이상승: 욥기, 여공의 그리스도와 만남 그리고 엔도 슈사쿠의 침묵


욥기, 여공의 그리스도와 만남 그리고 엔도 슈사쿠의 침묵

몇일간 일감이 없고 아내와 작은 아이가 직장과 학교로 가고 없을 때 집에서 나혼자의 시간은 한가롭고 약간은 초조하기까지하다. 이런 때에 나는 시간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안다. 읽고 싶은 책들중 하나를 골라 읽기 시작한다. 몇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아니면 몇 일  또는 몇 달이 갈 수도 있다. 때론 opera 한편을 들을 때가 더 좋을 수 있지만 요새는 엠프가 고장나 들을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엔도 슈사쿠, 그의 이름은 어렸을적부터 알고 있었다. 나의 나이 또래의 대다수 한국사람들은 일본 작가의 글은 한 수 아래로- 다른 외국 작가와 비교하여-내려다본다. 상호간 얽히고 설킨 역사적 자존심으로 말미암아 서로에 대한 연구보다는 라이벌의식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결혼식 주례를 맡아 주셨던, 내가 좋아하는 도종우 목사님께서 엔도 슈사쿠를 언급하셨을 때도 그냥 한 일본 소설 작가 정도로 치부하였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몇 번 그 이름을 접할 기회가 있었으나 특별히 마음 쓰지 않았다. 내가 아는 선배 한 분이 말하길 우리는 운문(시)이 강하고 일본은 산문(소설)이 강하다고 말하면서 읽기를 권했을 때도 다음에..하는 말로써 거절하였다. 그네들은 벌써 2명(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을 배출했지만 아뭏든 나는 그네들의 글을 폄하하였다.

얼마전 인터넷을 통하여 어떤 목사님의 강의를 접했을 때 그 목사님께서도 도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언급하시면서 ‘신의 부재’혹은 ‘하나님의 침묵’을 인용하셨다.

아! 이젠 한번은 읽어봐야겠다 하는 마음을 먹었다.

몇일전 오전에 시장을 가면서 겸사 겸사 서점에도 들렀다. 없으면 주문하지..하는 마음을 먹고 도와주시는 분께 제목과 저자를 이야기했더니 꼭 한 권이 남아 있었다. 얼른 지불하고 집으로 돌아와 읽기 시작했다. 다행히 일본 센코쿠<전국>시대와  에도 바쿠후<에도막부>시대 초기 역사에 대한 공부가 조금 있어서  읽는데 별 지장없이, 아내가 퇴근하고 오기 얼마전에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포르투칼인 로드리고 신부가 17세기 초 천주교 탄압시기 때  일본에 잠입하여 목양과 체포 그리고 투옥과 신도들을 위한 배교의 과정을 그려나간 실제 역사적 인물을 소설화 한 것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같이…

나가사키 영주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그리스도의 성화상을 밝고 지나가면 신부와 신도들을 모두 살려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신부가 보는 자리에서 신자들을 고문하고 죽이겠다고 하면서 신부의 선택을 강요한다. 실로 신부는 진퇴양난이다.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돌아설 수도 없다. 그때 로드리고 신부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이 책을 덮으면서 나는 ‘욥기’와 1977년에 있었던 김수환 추기경의 일화가 내 가슴속을 관통했다. 우리 모두가 ‘욥기’에서 욥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물론 욥기안에서 산문속의 욥과 운문 속의 욥이 차이가 있으나 욥기 저자는 욥의 항변과 친구들의 대화에서 세상을 살면서 격는 무죄한 자의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또 1977년에 있었던 추기경의 일화에서는 테레사 수녀와 그녀의 조력자였던 앤드류  신부와 더불어 서울에서 일하는 젊은 근로자들과 같이 한 자리에서 영세명이 벨라데타라는 한 젊은 여성 근로자가 자기의 생활보고중 열악한 근로 조건과 환경,법정 노동시간이 지켜지지않는 장시간의 고통스러운 노동, 함께 일하는 근로자들의 낮은 교육수준으로 인한 그들의 의식, 벨라데타는 동료들에게 노동자로서의 긍지를 심어주고 인간의 존엄성을 깨우쳐주려했으나 모든 것이 허사였다. 그녀는 추기경과 방문객들에게 질문 한다. “그리스도는 그 공장의 어디에 있습니까? 계시다면 왜 우리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해주시지 않습니까?” 그 때 추기경께서는 할 말이 없으셨다고 한다. 바로 그때 앤드류 신부가 말했다. “ 벨라데타, 바로 당신이 그 여공들에게 그리스도입니다.십자가에서 고통을 겪고 절망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당신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는 그 가난한 여공들이 역시 고통받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의 침묵.

교회를 다니면서 내가 겪는 큰 곤혹스러움이었고 현재 진행중인 물음이다. 물론 신심이 깊으신 분들은 잘 극복하시고 넘어가지만 나같은 사람은 많은 방황과 회의 그리고 질문한다. 왜 주님은 침묵하시는가?

욥의 항변과 벨라데타의 질문 그리고 로드리고 신부의 처절한 외침!

“주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나는 그것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금씩 어렴풋이 다가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 느낌을 나는 사도 바울의 말로써 대신할까한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 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있습니다.’<빌립보서 3:12>

마지막으로 ‘침묵’중에서 가슴 먹먹하였고 눈시울 뜨거웠던 대목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신부는 양쪽 손으로 성화를 들어 올려 얼굴에 가까이 가져 갔다. 많은 사람들의 발에 밟힌 그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꼭 대어보고 싶었다. 성화속의 그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밟혀 거의 닳아 없어지고 오그라져 있었다. 그분은 신부를 슬픈듯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서 정말 한 줄기 눈물이 넘쳐 흐를 것만 같았다. “아!아 아프다.” 신부가 몸부림쳤다.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일뿐이오. 형식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게 아니겠소” 통역은 흥분해서 서두르고 있었다.”형식으로만 밟으면 되는 거요.”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이 저린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 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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