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승; 어느 사순절기 아침에


어느 사순절기 아침에

  인간의 역사 가운데 전무후무하게 신의 이름을 유일하게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죽었다가 부활하였다고 알려진 오직 단 한명의 인물이었다. 그를 메시아로 고백한 이들은 십자가에서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음을아울러 고백하고 있다. 이것이 이성적으로, 역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합리론과 경험론은 서양철학의 단단한 두 기둥이요, 과학은 21세기 현대의 우상이다. 죽은자의 부활이라는 것이 이렇듯 ‘이성’과 ‘경험’과 ‘과학’으로 바라볼 때 심각한 불일치가 생겨난다.

위대한 신학자이자 아프리카의 성자였던 슈바이처박사는 그의 저서 ‘예수전 연구’에서 “역사적 예수의 추적은불가능하다”라고 말하였고 젊었을 적에 한동안 나의 종교적 정신세계의 큰 영향을 준 신학자 불트만은 “예수에관한 성서 기록은 신화이며, 역사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라 주장하였다. 또 내가 나의 카톡 프로필에 그의 말을표어로 쓰고 있는 본회퍼 목사는 “만약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다면 이제까지의 믿음이 환상이었음을 증명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샤르댕 신부가 지적한 것 처럼 믿는다는 것이 다 이해한다는 뜻은 아닐테고 믿는 이들에게는 충분한 빛이 ,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충분한 어두움이 있을 것이다.(Pascal)

하지만 부활의 신앙고백만으로 부활의 혁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비한 경험이 부활의 혁신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어느 개인의 신비한 경험만을 고집하는 것은 종교적 아집일 따름이다.

나는 여기서 가장 오래 전에 쓰여진 예수의 부활전승에 집중한다.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흘만에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후에 그리스도께서는 한번에 오백명이 넘는 형제 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고전 15:4~6)

서기 50년대에 후반에 쓰여진 바울의 고린도 전서는 우리가 아는 사복음서중 가장 일찍 쓰여진 복음서보다도십오년정도 앞서며, 부활 사건이 일어난지 30년이내에서 작성된 문서이다. 아무 근거 없이 바울이 이 수백명이주님을 뵈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거짓말 때문에 순교할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부활전 죽기를 맹세하고도부인하고 도망쳤던 베드로가 주를 위해 순교할 수 있게 한 것도 그러한 확신이 없으면 어림없는 일일 것이요,바울과 많은 이들의 순교가 그러했을 것이다.

‘침묵’의 작가 엔도슈사쿠가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그들의 예수의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라고말했다.

변화와 쇄신에는 반드시 그 바탕이되는 진실이 있게마련이다. 제자들은 바로 그 진실을 만났던 것이라고 밖에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부활을 믿느냐 거부하느냐하는 것은 그 당시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실존적 문제이다.삶속에서 고백되지 않은 부활은 역사속에 신화 일뿐, 인격과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부활의 신조는 삶의 실존의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다.

신조(Credo)의 암송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부활에 참여하겠노라고 고백하는 증인들에게 자비하신 주님의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One Response to 이상승; 어느 사순절기 아침에

  1. Joshua Kim says:

    집사님의 내공이 느껴집니다.
    부활신앙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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