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과 이웃 (황태섭 집사)
2014/11/11 댓글 남기기
지난주에 목장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성경 공부를 하였다. 목장 모임 전에 목자께서 질문에 대한 묵상을 위해 본문과 질문을 미리 공지하여 주셨는데, 잘 알려진 내용과 익숙한 주제였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없이 성경 공부에 임하게 되었던 것 같다. 자주 접했던 성경 본문이지만 늘 마음 한켠에 부담을 주는 주제라는 생각이 있었다.
목장 모임 중에 다양한 질의와 토론이 오고가며 예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깨달음이 있었다. 이번 성경 공부를 통해 새롭게 다가온 것은 ‘이웃’에 대한 새로운 의미였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경의 핵심을 압축하고 또 압축한다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을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주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이웃’을 ‘내 주위에 살거나 나와 가까운 관계 속에 있는 사람’으로 해석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듯이, 나도 주위 사람들에게 댓가를 바라지 않고 조건없이 이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좋은 이웃이 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늘 주고 받는 관계 속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받기만 해도 부담스럽고, 주기만 해도 야속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때로는 적당한 선을 긋고 그냥 안주고 안받는게 마음 편하다라는 핑계 속에서 살기도 한다. 물론 그래도 마음이 좀 넓은 분들은 사전적인 의미의 ‘이웃’들에게 조건없이 베풀고 도우면서 살아간다. 그 정도만 해도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참 좋은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이야기한다.
나 또한 이러한 생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질문을 던졌던 율법교사도 그러한 사전적인 의미의 ‘이웃’을 기준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강도를 만난 불행한 그 사람은 이전에 사마리아인과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이란 내 주위에 있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만이 아니라, ‘강도를 만나 본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이었다. 나와 일면식도 없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애타게 바라고 있는 절체절명에 놓여 있는 사람들.
그러고보니 예수님은 성경 속에서 늘 약한 자들과 버림받은 사람들 편에 서셨던 것 같다. 거지, 과부, 고아, 문둥병자, 사회적 천대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인, 간음이라는 누명을 쓰고 돌로 사형 당할 위기에 놓였던 여자, 사회적 편견과 저주의 대상인 장애인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먼저 사랑하셨고, 우리에게도 이들이 바로 ‘이웃’이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귀찮아서 피하고, 두려워서 외면하고, 괜히 가까이 있다가 오해를 받을까봐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는 내 자신의 모습이 다시금 부끄러워진다. 예수님의 말씀을 과감히 확대 해석한다면, 제사와 성결 예식을 따라 행동했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은 잘 지켰지만 ‘영생’이 없는 삶이다. 남에게 피해 안주고, 주일이 되면 교회에 가서 봉사하며, 주위 사람과 적당히 잘 지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에 별다른 관심없이 살아가는 내 삶은 어떤 것이 자문해본다. 솔직히 두려운 마음이 든다.
또 한가지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던 것은..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늘 가까이 하는 사람들 중에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으로는 강도 만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적당한 가면을 쓰고 아프지 않은 척 해야 살아갈 수 있는 현실 속에서 ‘강도를 만나 마음이 무너진 가까운 사람들’부터 다시 살펴봐야겠구나 싶었다. 가족들 중에, 친구들 중에, 교회 식구들 중에, 회사 동료들 중에.. 아프지만 아프지않은 척하면서 살아가는 이들도 소중한 이웃들이다. 이들에게 다가가 그저 묵묵히 상처를 싸매고 같이 아파하고 위로할 수 있는 용기가 있기를 소망하고 기도해본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예전에 ‘나쁜 사마리아인’이라는 책을 접한 적이 있었는데, 그 책 제목이 기억이 난다. 겉으로는 좋은 사람인 것 처럼 멋진 취지와 그럴 듯한 명분으로 다가가서 실제로는 아주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경우를 패러디한 제목이었다. 신자유주의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내세우면서 실질적으로 경제적 폭력을 휘두르는 선진국들을 상징한 ‘나쁜 사마리아인’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접할 수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과 21세기 현실을 대표하는 ‘나쁜 사마리아인’.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할지 조용히 자문의 시간을 가져본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