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와삽비라사건과두려움 / 김의걸 집사

Unknown

나는 가드너로 몇년동안 어느 미국교회의 가든을 관리한 적이 있다.
그 교회는 당시 가장 큰 손님이었다. 내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서비스를 그만 두라는 편지를 받았다. 그런데, 행정을 보는 사람의 실수인지 서비스를 그만 두었는데에도 돈을 보내왔다. ‘돌려주어야지’ 하면서 입금을 시키지 않고 집에 몇달을 두었는데, 언젠가 돈이 급하여 입금을 하여 써 버렸다.

나는 역사를 굉장히 좋아한다.
TV드라마도 역사드라마만 본다.
요즘은 ‘정도전’을 열심히 보고 있다.
성서 중에도 역사적인 사실들과 관련된 것은 더욱더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목장모임에서도 새벽기도회에서도 초기 기독교 역사인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새벽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아 정신없이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였는데, 목사님이 말씀 제목이 ‘사람을 의식하는 삶’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였다.

다른 분들은 이런 성경구절을 접하면 어떤 생각이 먼저들까?
나는 ‘참 억울하다.’는 생각이 먼저든다.

베드로의 책망을 보면 더 가관이다.
“아나니아, 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 판 돈의 일부를 빼돌렸소? 팔기 전에도 그 땅은 당신 것이었고 판 뒤에도 그 돈은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요? 그런데 어쩌자고 그런 생각을 품었소? 당신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3,4절)

몇개월전에 예수님이 체포당해 심문당하는 그 현장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던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이렇게 몰아붙이고 있다.
크게 다르지 않는 아나니아와 베드로, ’불공평하다’는 생각 또한 든다.
아주 일반적인 사건 중의 하나로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을 이 이야기가 베드로로 인하여 황당한 결말로 흘러가게 된다.

다른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전혀 아나니아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베드로의 꾸중을 듣자 즉시 아나니아는 그자리에서 꺼꾸러져 죽고 말았다.
그후 가족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장례절차도 밟지 않고 시신을 간단히 처리했다.

“젊은이들이 들어와 그 시체를 싸 가지고 내어다 묻었다.”(6절)는 구절을 보면 흡사 조폭들이 배반한 조직원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모습과 쏙 빼 닮았다.
공동체의 구성원의 사망을 이렇게 처리하는 것은 한 인간의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인가?
‘설사 무슨 사정이 있더라도 이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또한 든다.

산상수훈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하지 말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한다.’라는 말씀을 목사님이 인용하신다.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과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이 이런 정도로 무거운 죄였을까? 이런 기준에 의한다면 우리들 모두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당장 죽어야할 사람들이 아닌가? 그래서 ‘무섭다’라는 생각이 마지막으로 든다.

이 이야기의 키워드는 ‘두려움’인 것 같다.
아나니아가 죽었다는 말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으며’(5),
삽비라 사건을 전해들은 사람들도 역시 “몹시 두려워하였다.”(11).
아나니아나 삽비라와 전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던 교회 공동체 사람들과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누가는 이 “두려움”을 말하고 싶어 이 불합리한 것처럼 느껴지는 애피소드를 기록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떤 거짓말도 통할 수 없는 투명한 새로운 세계,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하나님의 심판!

어린아이들이 엄한 아버지에게서 느끼는 느낌?
조직을 이탈하고 싶지만 사이비 교주앞에서 공포에 휩싸는 여신도?

과거의 어떤 경험이 떠오른다.
3년정도 전에 절벽에서 떨어져 사경을 해맨 적이 있고, 우여곡절끝에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퇴원하게 되었다.

이 엄청난 사건 의 경험속에서‘감사’ ‘은혜’ 이런 것도 있지만 나에게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느낌은 ‘두려움?’이다.

어떻게 표현하기가 힘들다.

나는 한국에서 사망사건을 조사하는 일을 오래동안 했다.
그 습관때문인지 그 절벽에서 사건의 인과관계를 조사해보고 싶어 퇴원 후 얼마되지 않아 그 현장을 방문했다.

그 때 그 알수없는 ‘두려움’ ‘경외’ ‘아득함’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강열한 힘같은 느낌을 받았다.

수많은 사망현장을 다녀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이런 지형지물에서 내가 살았났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뭔가 꿈을 꾸고 있다는 느낌, 모든 사람이 나를 속인 것 같은 느낌,
같이 간 아내의 신경질적 반응은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그 현장을 방문했지만, 도저히 내가 하려고 했던 조사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그 현장이 뭔가 신비로운 기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그 자리에서 느끼는 그 ‘두려움’의 실체는 뭐라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 두려움은 어떤 사람이 지옥의 고통을 상상하면서 느끼는 두려움같은 것과는 다르다.

뭔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큰 힘 앞에서 느끼는 놀라움같은 것이다.
이 두려움의 힘은 뭐라 하기가 힘들지만 보통의 두려움처럼 나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신앙을 만드는 힘이 된 것 같다.
의도치 않게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나열하게 되었다.

어쨋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에피소드는 ‘두려움’ ‘경외’’거룩함’ 이런 의미를다시한번 자꾸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하늘 새땅, 인간의 죄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그 세계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성서는 ‘신비’의 하나님의 말씀이라 읽고 묵상을 할 수록 어렵고 아득하다.

김의걸 집사

이상승; 어느 사순절기 아침에

어느 사순절기 아침에

  인간의 역사 가운데 전무후무하게 신의 이름을 유일하게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죽었다가 부활하였다고 알려진 오직 단 한명의 인물이었다. 그를 메시아로 고백한 이들은 십자가에서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음을아울러 고백하고 있다. 이것이 이성적으로, 역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합리론과 경험론은 서양철학의 단단한 두 기둥이요, 과학은 21세기 현대의 우상이다. 죽은자의 부활이라는 것이 이렇듯 ‘이성’과 ‘경험’과 ‘과학’으로 바라볼 때 심각한 불일치가 생겨난다.

위대한 신학자이자 아프리카의 성자였던 슈바이처박사는 그의 저서 ‘예수전 연구’에서 “역사적 예수의 추적은불가능하다”라고 말하였고 젊었을 적에 한동안 나의 종교적 정신세계의 큰 영향을 준 신학자 불트만은 “예수에관한 성서 기록은 신화이며, 역사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라 주장하였다. 또 내가 나의 카톡 프로필에 그의 말을표어로 쓰고 있는 본회퍼 목사는 “만약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다면 이제까지의 믿음이 환상이었음을 증명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샤르댕 신부가 지적한 것 처럼 믿는다는 것이 다 이해한다는 뜻은 아닐테고 믿는 이들에게는 충분한 빛이 ,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충분한 어두움이 있을 것이다.(Pascal)

하지만 부활의 신앙고백만으로 부활의 혁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비한 경험이 부활의 혁신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어느 개인의 신비한 경험만을 고집하는 것은 종교적 아집일 따름이다.

나는 여기서 가장 오래 전에 쓰여진 예수의 부활전승에 집중한다.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흘만에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후에 그리스도께서는 한번에 오백명이 넘는 형제 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고전 15:4~6)

서기 50년대에 후반에 쓰여진 바울의 고린도 전서는 우리가 아는 사복음서중 가장 일찍 쓰여진 복음서보다도십오년정도 앞서며, 부활 사건이 일어난지 30년이내에서 작성된 문서이다. 아무 근거 없이 바울이 이 수백명이주님을 뵈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거짓말 때문에 순교할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부활전 죽기를 맹세하고도부인하고 도망쳤던 베드로가 주를 위해 순교할 수 있게 한 것도 그러한 확신이 없으면 어림없는 일일 것이요,바울과 많은 이들의 순교가 그러했을 것이다.

‘침묵’의 작가 엔도슈사쿠가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그들의 예수의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라고말했다.

변화와 쇄신에는 반드시 그 바탕이되는 진실이 있게마련이다. 제자들은 바로 그 진실을 만났던 것이라고 밖에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부활을 믿느냐 거부하느냐하는 것은 그 당시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실존적 문제이다.삶속에서 고백되지 않은 부활은 역사속에 신화 일뿐, 인격과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부활의 신조는 삶의 실존의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다.

신조(Credo)의 암송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부활에 참여하겠노라고 고백하는 증인들에게 자비하신 주님의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주수일: 사순절 40일 새벽기도회

우리집 뒤뜰 건너편 개울에 오랫만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림니다  바람소리도 들림니다
자연의 소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듣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활기찬 영성의 본질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입니다
기도는 듣는 기도와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심령에 들려오는 세미한 소리를 듣는 것 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 곧 신앙을 드리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기도는 자신을 다스리는 심리요법이나 자기 암시 혹은 긍정적 사고를 갖기 위한 수단 정도로
여기시지는 아니 하시리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인사 드림니다
이제 당신의 영혼의 정기검진과 그에 따른 처방의 시기가 됐음을 통고 드림니다
성령께서  우리 영혼을 엑스레이 검진보다 더 정밀한 검진을 통하여 감추어진 죄악과 상처나고
일그러진 품성의 결함을 알려 주고, 개으름,자기 판단과 오만의 중심에 선 나의 위치를 알려 줄 진단의
시간이며 동시에 맟춤형 처방의 기회가 40일 진행되는 새벽기도회라고 감히 말씀드림니다
그러나 선택은 개인 자유의지에 달렸지만  때론 예측 못한 방법과 수단으로  불러 내시기도,징계하시기도
좋은것으로 채워 주시기도 하심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소망(생각)은 우리의 행동을 안내하고, 행동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킴을 우리는 잘 알고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때는 물론 이지만  무탈하고 편안할 때 더욱 넘어지지 않도록 기도(감사)해야겠죠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10억분의1초를 다루는 나노세컨드 문화에 휩쓸려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실속에서 잊어 버린
당신의 소중한 영성을 되찾기를 소망합니다
아울러 육체적인 질병과 허약한 체질을 이번 기회에 처음에는 힘 들지만 체계적인 계획아래
건강도 되찾으시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부모로서의 기도의 모본과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저와 여러분이 함께 하여  감사와 은혜 넘치는
기도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힘들고 바쁜 당신의 일정을 과감히 변경 하도록 시도하십시요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 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전도서10:2)
당신은 오른편 입니까?  왼편 입니까?
-예배사역팀 드림-

이상승: 욥기, 여공의 그리스도와 만남 그리고 엔도 슈사쿠의 침묵

욥기, 여공의 그리스도와 만남 그리고 엔도 슈사쿠의 침묵

몇일간 일감이 없고 아내와 작은 아이가 직장과 학교로 가고 없을 때 집에서 나혼자의 시간은 한가롭고 약간은 초조하기까지하다. 이런 때에 나는 시간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안다. 읽고 싶은 책들중 하나를 골라 읽기 시작한다. 몇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아니면 몇 일  또는 몇 달이 갈 수도 있다. 때론 opera 한편을 들을 때가 더 좋을 수 있지만 요새는 엠프가 고장나 들을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엔도 슈사쿠, 그의 이름은 어렸을적부터 알고 있었다. 나의 나이 또래의 대다수 한국사람들은 일본 작가의 글은 한 수 아래로- 다른 외국 작가와 비교하여-내려다본다. 상호간 얽히고 설킨 역사적 자존심으로 말미암아 서로에 대한 연구보다는 라이벌의식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결혼식 주례를 맡아 주셨던, 내가 좋아하는 도종우 목사님께서 엔도 슈사쿠를 언급하셨을 때도 그냥 한 일본 소설 작가 정도로 치부하였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몇 번 그 이름을 접할 기회가 있었으나 특별히 마음 쓰지 않았다. 내가 아는 선배 한 분이 말하길 우리는 운문(시)이 강하고 일본은 산문(소설)이 강하다고 말하면서 읽기를 권했을 때도 다음에..하는 말로써 거절하였다. 그네들은 벌써 2명(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을 배출했지만 아뭏든 나는 그네들의 글을 폄하하였다.

얼마전 인터넷을 통하여 어떤 목사님의 강의를 접했을 때 그 목사님께서도 도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언급하시면서 ‘신의 부재’혹은 ‘하나님의 침묵’을 인용하셨다.

아! 이젠 한번은 읽어봐야겠다 하는 마음을 먹었다.

몇일전 오전에 시장을 가면서 겸사 겸사 서점에도 들렀다. 없으면 주문하지..하는 마음을 먹고 도와주시는 분께 제목과 저자를 이야기했더니 꼭 한 권이 남아 있었다. 얼른 지불하고 집으로 돌아와 읽기 시작했다. 다행히 일본 센코쿠<전국>시대와  에도 바쿠후<에도막부>시대 초기 역사에 대한 공부가 조금 있어서  읽는데 별 지장없이, 아내가 퇴근하고 오기 얼마전에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포르투칼인 로드리고 신부가 17세기 초 천주교 탄압시기 때  일본에 잠입하여 목양과 체포 그리고 투옥과 신도들을 위한 배교의 과정을 그려나간 실제 역사적 인물을 소설화 한 것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같이…

나가사키 영주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그리스도의 성화상을 밝고 지나가면 신부와 신도들을 모두 살려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신부가 보는 자리에서 신자들을 고문하고 죽이겠다고 하면서 신부의 선택을 강요한다. 실로 신부는 진퇴양난이다.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돌아설 수도 없다. 그때 로드리고 신부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이 책을 덮으면서 나는 ‘욥기’와 1977년에 있었던 김수환 추기경의 일화가 내 가슴속을 관통했다. 우리 모두가 ‘욥기’에서 욥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물론 욥기안에서 산문속의 욥과 운문 속의 욥이 차이가 있으나 욥기 저자는 욥의 항변과 친구들의 대화에서 세상을 살면서 격는 무죄한 자의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또 1977년에 있었던 추기경의 일화에서는 테레사 수녀와 그녀의 조력자였던 앤드류  신부와 더불어 서울에서 일하는 젊은 근로자들과 같이 한 자리에서 영세명이 벨라데타라는 한 젊은 여성 근로자가 자기의 생활보고중 열악한 근로 조건과 환경,법정 노동시간이 지켜지지않는 장시간의 고통스러운 노동, 함께 일하는 근로자들의 낮은 교육수준으로 인한 그들의 의식, 벨라데타는 동료들에게 노동자로서의 긍지를 심어주고 인간의 존엄성을 깨우쳐주려했으나 모든 것이 허사였다. 그녀는 추기경과 방문객들에게 질문 한다. “그리스도는 그 공장의 어디에 있습니까? 계시다면 왜 우리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해주시지 않습니까?” 그 때 추기경께서는 할 말이 없으셨다고 한다. 바로 그때 앤드류 신부가 말했다. “ 벨라데타, 바로 당신이 그 여공들에게 그리스도입니다.십자가에서 고통을 겪고 절망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당신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는 그 가난한 여공들이 역시 고통받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의 침묵.

교회를 다니면서 내가 겪는 큰 곤혹스러움이었고 현재 진행중인 물음이다. 물론 신심이 깊으신 분들은 잘 극복하시고 넘어가지만 나같은 사람은 많은 방황과 회의 그리고 질문한다. 왜 주님은 침묵하시는가?

욥의 항변과 벨라데타의 질문 그리고 로드리고 신부의 처절한 외침!

“주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나는 그것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금씩 어렴풋이 다가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 느낌을 나는 사도 바울의 말로써 대신할까한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 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있습니다.’<빌립보서 3:12>

마지막으로 ‘침묵’중에서 가슴 먹먹하였고 눈시울 뜨거웠던 대목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신부는 양쪽 손으로 성화를 들어 올려 얼굴에 가까이 가져 갔다. 많은 사람들의 발에 밟힌 그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꼭 대어보고 싶었다. 성화속의 그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밟혀 거의 닳아 없어지고 오그라져 있었다. 그분은 신부를 슬픈듯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서 정말 한 줄기 눈물이 넘쳐 흐를 것만 같았다. “아!아 아프다.” 신부가 몸부림쳤다.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일뿐이오. 형식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게 아니겠소” 통역은 흥분해서 서두르고 있었다.”형식으로만 밟으면 되는 거요.”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이 저린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 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김의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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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다 보면 구원에 이르는 문은 여러 개가 아닌가 싶다.

산상수훈을 보면, 마음이 가난하더든지 그냥 가난하기만 해도 천국은 저희 것이라고 한다.

거지 나사로를 보면 그냥 천국에 갔다.

낯선 나그네를 환대해도 천국간다. 고대사회에서는 어떠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현대와 같은 불신사회에서는 낯선 나그네를 환대하기가 싶지 않을 것이다.

목장모임과 관련해서 네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을 만났고 중풍병을 고친 이야기를 접했다.

유년주일학교때부터 듣던 매우 익숙한 이야기이지만,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했다.

 

친구들 잘 두는 것이 또 다른 구원에 이르는 문인가?

지붕을 뜯고 예수앞에 등장한 중풍환자와 그를 도운 사람들의 무례함이 먼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수많은 무리들 대부분이 자신의 병의 치유를 기대하거나 각자가 원하는 이해관계속에서 예수를 만나기를 원하여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운집해 있는 곳에서 이들의 행위는 새치기수준을 엄청 넘어선 거의 폭력에 가깝다.

그들의 행위가 야기하는 소음, 먼지 등이 예수님을 비롯한 거기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환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예수앞에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 드디어 자기 차례가 된 심한 천식에 걸린 어린 아이가 부모의 품에서 고통스러워하면서 있었을 수도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니 화가 난다.

이런 몰상식한 이야기를 복음서 기자들이 왜 중요하게 다루었을까?

진짜로 친구들 잘 두는 것이 또 다른 구원에 이르는 문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인가?

 

복음서에는 유난히 장애자, 환자의 이야기가 많다. 다른 종교의 경전에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유는 유대인들이 질병에 대하여 가지는 독특한 의식, 즉 죄로 인해 병에 걸렸다는 의식때문인 것 같다. 예수의 제자들조차도 선천성 시각장애인을 보고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냐?”라고 묻기까지 하였으니….

이야기의 주인공의 하나인 중풍병자의 처지와 상황을 이해해 보려해도 그의 이름은 당연히 알지 못하고 특이하게도 그 사람의 대사 한마디도 없다.

예수님앞에 오기전의 그를 합리적으로 추정을 해보면,

아마 이 중풍병자는 몸이 병들었다는 사실 자체뿐만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 때문에 훨씬 심한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는 이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비난하고 그 비난은 그의 마음까지 병들게 하였을 것을 쉽게 추정할 수있다.

사실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병들고 무식하고 가난한 것이 무슨 죄로인한 것인양 취급하는 경우가 있다.

한편, 원인이야 어쨌든지 참 불쌍하다고 여기고 도와주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사람을 도와주던 네사람처럼… . 아마 그는 이런 주변의 동정심으로 버텨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예수님이 이들의 믿음 보고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 네 사람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것 같다. 중보기도의 중요성 이런 것들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곰곰히 상식선에서 이들의 동정심(이런 예수님이 믿음이라고 말하였지만)을 곱씹어보면, 요즘도 장애인에 대하여 동정심을 경계하고, 있는 그대로의 친구가 되는 것이 중요하듯이, 중풍병자를 동정심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되면 이들사이에는 늘 틈이 놓이게 된다. 심한 경우에는 중풍병자를 도와주는 것이 자신의 도덕심을 증명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한편 예수님 앞에서의 이 환자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은 자발적이었든지 친구들의 권유때문이든 우여곡절끝에 병이 낫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예수 앞에 등장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병은 죄로 인한 것이라 확신하는 서기관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신의 죄를 결정적으로 증명해낼 수 있는 서기관들 앞에서 이 중풍병자는 아마 절망에 늪에 있는 자신의 처지를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죄가 용서받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실제로 당하는 육체적 질병보다 훨신 감당하기 힘들었던 마음의 병을 제거해주는 소리였을 것이다. 이 사람이 예수의 말을 그대로 믿었는지 아니면 얼떨떨해 했는지 성서가 묘사하고 있지 않고 있긴 하지만 그 후 병이 실제로 치유된 것을 보면 마음의 병이 씻겨졌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예수의 말씀에 집중해 본다.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아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 서 어느쪽이 말하기 더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내가 네게 말할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라”

한마디 한마디가 의미심장하고 가슴이 떨린다.

 

장애인을 죄인으로 단정하고 자기 공동체로부터 구별해버리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의 전통에 근거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장애인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알고 있었고 이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중풍병이 치유되기 전에 즉,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라”고 말하기 전에 이미 온전한 인간,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으로 회복된 것이다. 인간이 견디기 힘든 것은 장애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차별이 아니겠는가?

역시 이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었고, 그 상대방 악역은 서기관과 인간성을 말살하는 율법에 휩싸인 유대종교지도자들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그 선포가 소수자에게는 차별과 왕따 세상인 유대땅의 장애인들과 소수자들에게 진정 희망의 메세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이 사죄선포가 빌미가 되어 ‘신성모독’의 죄로 십자가처형의 빌미가 되었으니…

이 사죄선포는 예수님의 전 생애, 전 기독교의 역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였던 것이다.

(교인의 글/김의걸 집사)

11/24 추수감사절 주일 기도 (배미정 집사)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 동안 땀 흘려 가꾸고, 노력하고 수고한 결실을 거두는 추수 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교회와 가정에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셔서 풍성한 수확을 얻게 하셨음에 감사합니다. 작은 씨앗이 자라나서 풍성한 열매가 된 것처럼, 저희들의 믿음 또한 크게 자라서 신실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한국의 추위와 김장을 떠올리며 고향을 그리워하고, 친구를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언제든지 가고 싶을 때 찾아 갈 수 있는 내 고향 내 나라가 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제목을 기꺼이 나누고 같이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동 역자들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오래오래 옆에 있게 하시고 내가 그들에게도 믿음직한 중보기도자가 되도록 믿음이 자라게 하여 주옵소서.

예전과 다르게 요즘은 유혹이 많고, 집중하기 어려운 세상이라 우리의 자녀들이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내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깊은 사랑으로 보호하여 강하게 하여 주셔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의지하여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옵소서. 우리의 자녀들이 꿈꾸는 세상을 허락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이 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2013년도 한 달 조금 넘게 남아 있습니다. 이 남은 기간 동안 연초에 세웠던 계획들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고, 은혜 가운데 따뜻한 연말을 맞이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장효수 목사님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성령 충만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어 우리 성도들이 주님께 한 발 짝 더 나아가는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껏 거두어 들인 모든 결실에 감사하여 드리는 오늘의 예배를 기뻐이 받아 주시고 새하늘 우리교회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풍성히 얻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배미정 집사)

감사(感謝)의 계절에 (주수일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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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매사에 빈틈 없고  깔끔하며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별 흠이 없고  남에게 해를  주지 아니한  삶과 생각을 가진 한 사람이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시여!  저에게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토색 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멀리하며 간음도 하지 아니한 삶을 살아 왔음을 감사하며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도 드렸음을 감사합니다.”

누가복음18장9절에 나오는 바리세인의 기도의 내용입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크리스챤이 이렇게만 살 수 있어도 박수 받을만한 일 입니다. 감사 기도(?) 드릴만 합니다. 이 대목은 다른사람 곧 세리와 같지 않음을 자랑하면서, 한편 자기 자랑을 늘어놓은 것 에 불과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잘못된 감사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저는 한해를 마무리 할  감사의 계절에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에 당연히 감사하지만 참된 감사는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 봅니다.

감사란 은혜를 입은 자가 은혜를  주신 분에게 겸손한 마음과 겸손의 손으로 드리되  항상 부족한 마음으로 최대의 예의를 담아 드리는 감사 이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교만한 감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조건부적인 감사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민족들에게는 추수감사절 같은 행사, 우리나라로 말하면 추석같은 명절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대부분이 신에게 감사 할 뿐만 아니라  조상들에게  또는 살아 계시는 웃 어른들에게 인사드리고 작지만 감사의 선물을 드리기도 합니다.

마가복음7장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교인들을 책망한 사건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부모에게 드릴 감사를 외면하고 아비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고르반 되었다, 즉 하나님께 드렸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책망한 사건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감사하지 못한 사람이 이웃이나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것은  어찌보면  윤리적 위선이고  신앙적으로는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다를바 없습니다. 저 또한 위선과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하는 자 에게 가까운지라 무엇을 훈계함이 아니고  이 계절에 자칫하면 무관심속에 지나칠 수 있는 부모님께 감사하고  조금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주변을 돌아 보자는 마음에서 입니다. 내 위주로만 익숙해 지다 보니  감사는 척박해 지고,인색한 감사, 교만한 감사,억지로 하는 감사,자랑인지 감사인지 입으로만 하는 무분별한 감사 등… 진정한 감사를 나는 드렸는지 생각해 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성탄절헌금을 불우한 이웃이나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자 들을 위하여, 전액 사용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진정 이런한 일들이 감사의 표현이며 또 하나의 믿음의 실상이요 증거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어려울 때 해야 가치가 있다고들 흔히 말 합니다.

풍요롭고  일이 잘 풀릴때 드리는 감사도 귀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감사는 힘들 때 ,가난할때, 고통스러울 때 드리는 감사는  반드시 축복의 부메랑으로,  어떠한 환란도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함임을 깨달아(히12:10) 감사를 드리기를 소망합니다.

한나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잊지 아니하고 기억하며 드리는 감사와  하박국처럼 척박한 환경과 환란속에서도 드릴 수 있는 감사는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며 순종하는 자세일 때에야 가능합니다.

이제 모든일에 감사하며  행동으로 감사하는  풍성한 감사의 열매가  이웃과 함께 나누는 계절이기를 소망합니다.

(주수일 집사)

11/10 주일 기도 (오경혜 집사)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주일에 저희들 이렇게 주의 전으로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이 온전히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 만한 귀한 예배가 되도록 저희 마음을 열어 주셔서 저희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 되기를 소원합니다.

 

저희들 하나님의 자녀로 늘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함을 알면서도, 생활속에선 세상과 타협하고, 가진 것을 자랑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지냈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세상 속에 묻혀 세상의 것들에 욕심을 내고, 눈 앞에 보이는 작은 고통에도 짜증과 불평에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저희들의 이런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나님, 언제 어디서나 저희들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저희를 택하신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위해 베풀어 주신 것들에 눈을 돌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운전 중에 올려다 본 높은 가을 하늘과, 집 밖에 나갔을 때 느껴지는 햇빛의 따스함과, 잘 내려진 차 한잔의 향기를 맡으면서도 저희가 늘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감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먼저, 장효수 목사님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능력을 허락하시어 저희들 한사람 한사람마다 꼭 필요한 말씀으로 채워주시고, 이 예배를 위해 준비한 성가대와 찬양팀의 찬양을 하나님 기뻐 받아 주시옵소서. 특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배를 준비하고 기도하시는 집사님들의 정성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같은 시간 우리 아이들 유년부와 Youth부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섬기는 Bobby 전도사님, 정대경 전도사님과 함께하여 주시고,  우리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게 하시어,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을 앞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들에게 맡겨 주실 그 역할과 자리에서 전하고 나누며 살아가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이 예배를 통해 말씀과 찬양과 기도로 새로워져서 이번 한 주간도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도록 힘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오경혜 집사)

영새를 마치고-주수일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작년에 이어 40일의 새벽제단을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전에  영광과 감사를 올려 드림니다
새벽 3시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야 하므로,  때론 힘들고  고단하기도 하고  오가는 길도 만만치
아니 한지라 주저 않고 싶을때도 있었으나 40일의기간동안 하루도 빠지지 아니하고  참석한
그 분들이 있어 큰 힘이 되었음을 고백하면서 감사드림니다
또한 사정상 참석할 수 는 없었으나  기도로써 동참하시고 격려하여 주신 교우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감사와 함께, 은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약간은 느슨해지고  잊어버린 영성을  수 많은 질문을 통하여  알게 하시고 새삼 깨닫게 해 주심에
감사를 드리며  한편 성숙한 신앙은 훈련에서  비롯되기도 하므로  이 시간을 통하여 연단 시켜 주심에도
감사드림니다       이 모든 과정들이 우리들의 삶속에 스며드리라  생각합니다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남유다도 150 여년만에 비참하게  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이 불에 타고  시체는 온 지면을 덮을만큼 즐비합니다
여기 저기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림니다     바로 그때 에레미야가 우는 아이에게 가 봄니다
그 아이는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데  그 어머니의 젖에서는 피가 나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거죠         에레미야는 움니다   눈이 눈물에 상하고 창자가 끊어질 만큼  간이 땅에 쏟아질만큼
애통해 합니다   밤새 울다 지친 에레미야는 새벽이 되자 정신을 차리고 있는 힘을 다하여 찬양합니다
왜냐구요? 감사한 마음이 그를 사로 잡은 것 입니다  전멸되지 아니하고 살아 남은 백성이 있다는 희망을
발견한 것입니다
바로 그때 바벨론에서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른뼈들이 살아 나는 환상을 보여 주시면서 또한 희망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큰 일을 주심니다 희망을 주심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
알게 하시고  새로운 예루살렘의 성전을 지을 수 있는 조감도와 그리고 친히 설명을 주심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70년 포로시간이 징계에 있지 아니하고  장래의 소망과 평안을 주시기 위함인거죠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환난중에 있습니까? 감당키 어려운 고통속에 빠져 있습니까?
저는 이번 영새40일을 통하여 에레미야가 발견했던 희망을  에스겔에게 보여 주었던 소망을 저와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누리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하면 에스겔에게 주신 새성전 조감도를 받는
귀한 소명과 축복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영적갱신을 위한 40일 새벽기도회는 생명이 있는한  지속되리라 믿습니다
평생동안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하루 3번씩 무릎 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니엘처럼
감사의 기도를 드림시다
예루살렘에서의 에레미야의 눈물의 기도와 바벨론에서의 에스겔의 기도가 새하늘우리교회에서도 여러분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힘을 내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예배사역팀 드림-

10.20 주일 기도 (이미애 집사)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좋은 가을날, 주님 전에 나와 아버지께 찬양을 드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지난 한주간도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함께하시고 지켜주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지켜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아버지보다는 세상 것들로 가득 찼었고,
사랑해야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 마음속에 용서하지 못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살았었습니다.
또 죄인줄도 모르며 지었던 많은 죄들도 있습니다.
지금 이시간 부족한 이모습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기를 원하오니
보혈의 피로 정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정결한 마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가서 풍성한 은혜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할지라도,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아버지의 자녀됨으로 인하여
감사가 넘치는 이시간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지금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를 돌아보는 특별한 40일의 기도의 시간을  함께가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 눈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내가 돌아보아야할 이웃은 누구인지’…… 많은 질문들을 통하여 내 믿음을 돌아보는 시간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매일 매일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가야할 길을 비춰주는 등불이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등불이 모여서 새하늘우리교회의 큰 빛이 되고 이 빛이 어두운 이 시대를 밝히게 하여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단에 세우시어 말씀을 전하시는 장효수 목사님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심장으로 각 사람의 영적 부흥을 위하여, 한국교회의 회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주의 종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 하시는 모든 사역위에 주의 손이 함께하시어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매일 매일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의 종을 통하여 주시는 그 말씀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시어 말씀을 풀어주셨을 때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졌듯이 우리들의 가슴이 하나님께 향한 열정으로 뜨거워지게 하여주시고, 그 말씀이 골짜기의 마른뼈가 살아나고 생기가 돋듯이 잠자는 우리의 심령에 생기가 돌아서 우리 각자에게 향하신 주님의 선하고 온전하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어 주의 종과 새하늘우리교회를 통하여 이루고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시간 두 분 전도사님과 아이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함께하시어 어린 심령들의 눈과 가슴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에 빼앗기지 않고, 오로지 말씀속에서 기쁨을 발견하게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으로부터 받은 꿈과 비전을 가슴에 품고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열심히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물같이 흐르는세상을 위하여 귀히 쓰임받는 우리 아이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지금 이시간 아버지의 발앞에 엎드린 모든 심령들의 마음이 온전히 아바지께로만 향하여 각 심령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고, 우리의 눈이 주의 영광을 보게하여 주시옵소서.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이 시간 함께하지 못한 우리 믿음의 가족들에게도 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원하오며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미애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