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은 기도문 작성 (김의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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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날 조금 늦게 교회에 도착했다.

항상 그 자리에서 예배를 안내하시던 주수일집사님이 항상 그러듯이 ‘오랜만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그런 인사를 들을 때마다 항상 약간은 겸연쩍다.

그러면서 새벽기도회에 내가 기도하는 순서가 있다고 하셨다. 이틀 후의 화요일 새벽이었다.

여러사람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정말 오랜만인지라 혹시 실수 하지 않을까 싶어서 기도문을 작성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월요일 저녁에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문작성을 위하여 묵상을 했다.

아마 처음 작성해 보는 기도문일 것이기에 약간은 긴장도 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2년정도 전에 병원이 있을 때가 아득하게 떠오른다.

다른 것은 못하더라도 운전을 할 수 있을 정도는 건강하고 싶었다.

아무 탈 없이 퇴원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나의 장애로 내 아내나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위해서는 운전을 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재활을 위한 운동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운동하는 곳까지 휠체어를 타고가야 하나, 휠체어를 이용하지 않으려고 직원과 꽤 실랑이를 하기도 했다. 한번 휠체어를 이용하면 계속 이용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서…

운전에 필수적인 것이라 생각해서 하루에 1000번가까이 팔다리운동을 했다. 기껏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손가락 발가락 손목정도였지만,

퇴원을 하고 며칠되지 않아서 걱정하는 가족들 몰래 운전을 시도했다.

잘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가까운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넣고 오리라고 마음을 먹고 운전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주유호스가 너무 무거워서 그것을 드는 것이 힘들었지만 무사히 목표를 완수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 내 인생에서 가장 환희에 찬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이어지는 주일에 드디어 무사히 외출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스스로 운전을 해서 교회를 다녀온 것이다.

신앙적인 차원도 있었지만 그냥 본능적으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가드닝일을 한다. 이 일을 할 수 있게 인도하심에 감사한다.

일을 하는 시간이 가장 신앙적으로 집중하는 시간이다.

lawn mower를 밀면서 걸어가고 있으면 너무 행복하다. 다리를 옮길 때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조건없이 주신 은혜를 걸음 걸음마다 체험한다. 걸어가면서 일하고 있는 내 모습이 아름답고 신기하다.

몸이 아직 불편한 부분이 있어서 일이 좀 힘들 때가 있다. 그 때도 행복하다. 이만큼이나 움직이고 활동을 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하다.

같이 일을 하는 멕시코친구가 영어를 하지 못하는 것도 감사하다. 쓸데없는 수다를 떨 수가 없기에 하나님과의 대화에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일을 하면 몇시간은 하나님과 대화하고 기도하는 것 같다.

일하는 것이 ‘힐링’하는 시간이 되는 격이다.

현재 내 삶의 반정도를 이런 시간이 되도록 적절하게 배치되도록 인도하심에 감사한다.

 

컴퓨터를 켜고 이런 마음을 좀 일반적인 용어로 기도문을 작성을 시작하였는데 감사를 드리는 것만 계속되면서 2페이지가 넘어갔다.

할 수 없이 반정도의 분량을 지우고 간구하는 것으로 채워서 겨우 기도문 작성이 끝났다.

(김의걸 집사)

‘나아만의 오해와 믿음의 순종’과 그 이후 (김의걸 집사)

나아만의 오해와 믿음의 순종’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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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의 배경 에피소드인 나아만이야기는 성경지식이 부족한 내게는 좀 생소한 스토리다.

설교를 듣는 내내, 나아만의 평범한 이야기와 ‘믿음의 순종’이라는 엄청난 주제와는 격이 맞지않는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환자의 ‘절대적인 순종’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뒤따르는 치유은사의 구조에 익숙해서 그런지 뭔가 어색하고 불편하였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당연한 성품이겠지만 약간의 오만함이 느껴지는 적국의 장군,

그러나 포로로 잡혀온 종의 말을 믿고 이스라엘에 가는 모습이나 엘리사의 푸대접으로 화가나 있는 상태(사실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에서도 종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요단강에서 몸을 씻는 모습에서 보이는 겸손함이나 훌륭한 품격이 느껴지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이고 상대적인 품격이 절대적인 ‘믿음’, ‘순종’이라는 기독교신앙의 근본적인 주제에는 뭐가 미흡하다는 불편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얼른 열왕기하 5장을 다시 반복해서 자세히 읽었다.

그 뒷 이야기가 지극히 평범하지만 재미있는 구석이 있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은혜를 입은 나아만은 당연히 엘리사에게 사례를 하고 싶어했고 엘리사는 거절한다. 이것이 엘리사의 제자인 게하시에게는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엘리사 몰래 나아만을 쫒아가서 엘리사의 심부름이라고 하면서 은과 옷을 요구한다. 나아만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었고, 돌아온 게하시는 이 사실을 숨기지만 이 사실을 알고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나병이 걸리는 벌을 내리게 한다.

항상 약자의 편에서 생각하는 습관이 있는 나는 먼저 게하시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엘리사의 제자로 수행비서로 일하는 그는 너무 청렴한 엘리사로 인하여 항상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몰래 비자금을 마련했다가 위급할 때 엘리사를 위해서 쓰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나아만은 자주 이스라엘을 침공했던 적국의 장군이고, 자신의 친지나 지인들 중에는 분명히 아람에 포로로 잡혀가서 종살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원수에게 은혜를 배푸는 것도 모자라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는 엘리사의 처신이 못마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런 대가라도 받는 것이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정당한 권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게하시는 도적질을 한 것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을 약탈한 것도 아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이고 나아만도 보답할 기회를 얻게되어 기뻐했다.

엘리사와 오래 생활을 하여 엘리사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가 오직하면 이렇게 했을까, 분명히 무슨 사정이 있을 것이다라고 추정해 본다.

비극의 주인공인 ‘게하시’와는 정반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나아만’에게 일어난 일들을 다시한번 곱씹어 본다.

나아만은 평생 이방신을 섬겼을뿐 아니라, 여화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적국 아람의 최고장군이다. 아마 안중근에게 암살당한 ‘이또 히로부미’정도일 것이다.

병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을 찾아온 그에게 이스라엘왕 여호람이 극도의 공포를 나타내는 것을 보면, 온 백성의 원수였을 것이다.

그가 당당히 이스라엘을 방문하니 온 나라가 떠들석했을 것이고, 엘리사도 여호람의 공포를 알게되어 자기에게 보내라고 한다.

어쨋든 그는 지금도 천형이라고 불리는 나병을 고치게 되었다. 밑져봐야 본전이다는 요단강을 향하는 그의 심정은 성경에 잘 나타난다.

그가 엘리사앞에서 한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하는 고백은 기적적으로 아무런 대가없이 천형의 지병을 고친 그에게는 전혀 특별한 것이 없다. 당연하다.

또 재미있는 것은 이후에 아람왕을 도와서 림몬신당에 제사지내는 것도 허락을 받았다. 가장 중요한 여호와의 1계명을 어기는 것도 그의 정치적인 입장이 고려되어 용서가 된 것이다.

그 후에 그는 진정 여호와의 사람이 되었을까? 잘 모를 일이다.

어쨋든 이 장면에서는 평생을 엘리사 곁에서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던 게하시와 평생 우상을 섬기며 살았던 나아만의 운명이 극적으로 역전이 되고 만 것이다.

이 부당한 것같은 에피소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 ‘게하시’는 나병에 걸리고, 이방인, 적국의 장군은 그 병이 나아지고 축복받는 성서이야기.

항상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의식을 품고 사는 우리에게 엄청난 혼란을 준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당신의 우리를 향한 의지에 경외감을 넘어 공포가 느껴진다.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러나 주인공은 엘리사와 나아만 그리고 게하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병시인 한하운이 ‘소록도로 가는 길에’서 구슬프게 노래한 천형의 병 ‘나병’

결국은 온 몸에 감각을 잃어버리게 하는 나병. 그 나병이 진짜 주인공이었다.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걸려버린 나병에 대한 경고가 느껴진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감각이 죽어버린, 항상 믿음을 이야기하고 순종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무감각한 우리에 대한 경고.

이방인 나하만은 이제 영적인 감각이 살아났고, 거꾸로 하나님의 백성인 게하시는 영적으로 죽었던 것이다. 분별하는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십자가의 피로 산 우리들, 하나님이 진정 사랑하시는 우리들도 언제든지 영적인 분별의 감각을 잃어버릴 수 있고, 언제든지 상황은 역전될 수 있다는 무서운 그러나 진정어린 조언이 느껴진다.

목장모임을 할 때면 항상 마지막에 기도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 때 항상 나는 기도제목이 없다.

목장사람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도제목이 없고 또 별로 기도하지 않는 나에 대하여 신앙적인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사실 나는 현재도 많이 몸이 좋지 않다.내 아내는 나보다 더욱 좋지 않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별로 불행하지가 않다. 사도바울도 이 정도의 병이 있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런 질병을 낳게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다. 이 정도의 건강을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뭔가가 이루어지게해달라고 도와달라고 기도한 적이 까마득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그의 사랑과 인도하심에 감사할 뿐이다. 기도제목이 있다면 이런 상황속에서 나를 향한 당신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길을 걷다가 하늘을 바라보며, 잔디를 깎으며 땅을 바라보며 항상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나의 기도이다’

이것이 나쁘지 않은 고백이라고 생각되지만 내 삶이 일종의 종교적인 교양에 떨어져 있는 모습은 아닌지 두렵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26절)가 이 에피소드에 핵심 성구였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나병에 걸려있거나 항상 걸릴 수 있는 위험에 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그의 의지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진정 필요하다. 이런 예민한 감수성을 유지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기도가 필요하다.

전교인새벽기도회

기도에도 목적이 분명하고  내가  많이 부족한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여야  확신에 찬 기도
진솔한 기도를 할 수 있음을 느낌니다
다시 말해 중언부언 하지 아니하고 외식하는 자의 기도의 함정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늘로써 17일째 지나고 있습니다         저는 중보기도의 힘을 강하게 믿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제가 암수술을 받고 투병중일때 제가 전혀 알지도 못하고 부탁한 일도 없는데  몇교회의 교인들께서
저의 이름을 부르며 중보기도를 했다는 것을 훨씬 뒷에야 알았습니다   빗진자 입니다
그 중보기도의 힘으로 일어난 자 입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는  믿기지 아니 할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탤런트 김혜자권사님의 간증  많은 분들이 들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분은 담배를 피우지 아니하면 손이 떨려 일이 안될 정도로  줄담배를 즐기는 애연가 였습니다
그러나 계속 교회도 열심이셨고  성경책을 보면서도 한 손에는 담배를 놓지 않았다는 거죠
그런 그에게 미국에 사는 딸이 어머니의 금연을 위해 100일 새벽기도를 시작합니다
새벽마다 어린 아기는 남편에게 맡기고  독하게 시작한거죠
그 기간 중 어느날 어머니와의 통화중에 30여년을 피운 담배가 갑자기 싫어 졌다는 검니다   냄새마저 역겹다는
거죠.        무슨 힘 일까요?(대답은 스스로 하세요)                                                                                                                    
그러나 이런 일(?)들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요즘 40일새벽기도회를 통하여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저는 확신 하건데 그 분들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고  더디지만 저들을 통하여 큰 역사가 일어나고 기도회가 끝날 무렵에는  건강까지 회복되고
강건 해 지는 축복까지 덤으로 받으리라 확신합니다
“아브라함과 떠나는 신앙 여행”에 나오는 글귀 입니다
어떤 사람이 돼지 한 무리가 도축장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보았다  돼지들은 묶이지도 않은체 꼬리를 흔들며
스스로 도축장으로 걸어 들어 가고 있었다  이 광경을 신기하게 본 그는 돼지를 몰고 가는 사람에게
그 비결을 물었다”돼지들이 어떻게 당신을 따라갑니까?” 그 사람은 손에 들고 있는 콩을 보여 주었다
그는 콩을 조금씩 길에 떨어드리며 앞서 가고 있었다  돼지들은 죽을 줄도 모르고 당장 눈앞에 있는 콩을 주워 먹는
맛에 도살장 안에 제 발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여가활용,취미생활, 적극적인 경제활동  등등….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일 하고 즐겨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챤이라고 자처 한다면  어는 정도 절제되고 우선순위는 고민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크리스챤으로서의 구원의 문제, 심판의 문제는 애써 피하고 싶고   이런 문제들 앞에 성경에 나오는 롯의 사위들처럼
농담정도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
세상이 주는 달콤한 콩을 외면하고  내일 아침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맛나를 맛보며   함께 공동식사도 하면서
즐겁고 복된  전교인 새벽기도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배사역팀 드림-

에스프레소 커피 / 주수일

주수일 집사

 

에스프레소(Espresso)가 커피의 커피란다   고농축 커피란다
나는 커피에 대한 깊은 지식이나 그 맛과 향을 분별하거나 음미할 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피곤할때나 반가운 사람과 함께 나누는 한 잔의 커피맛은 무엇에 비견할 수 있을까…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그래서 이번에 그 진짜 맛을 맛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숙련되고 경험 많은 최고의 바리타스가 있어야 하기에  그 분도 모시기로 했다
최고의 맛과 향을 음미할 수 있는 한잔의 에스프레소를 맛보기 위해서………

저는 이번 영적갱신을 위한 40일새벽기도회를 기도의”에스프레소”라 생각하고 삼위일체 성령님을
바리타스로 초빙하여 그 분께서 손수 만드신 최고의 에스프레소의 맛과 향을 함께 나눌수 있는
시음회(영적갱신을 위한 40일새벽기도회)에  당신을 주님의 이름으로 특별히 초청합니다

기도회에 참석하라고 말하긴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긴 쉽지 않습니다
일하면서 참석한다는 것에 피곤함과 큰 부담감을 갖기도 하지만 ,실제로 시간이 많고 노는 사람에게는
더 쉽지 않음을 봄니다(실제 통계에도 나옴)
왜냐면 노는데 이미 익숙해 져서 개으름과 무감각이 이미 온 몸과 마음을 지배한지라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신분이라도 새벽시간에 40일정도의 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결단과 의지 아울러 약간의 희생없이는 힘들기도 합니다
물리적으로 강제하는것도 아니고 순수한 자율의지에 맡길뿐이니 일평생 한번도 체험하기 쉽지 않습니다
너무 큰 부담없이 가능한 본인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시고  최선을 다하여 부분적이라도 참석하시기를 권면 드림니다
끝으로 이야기 하나 소개합니다
유대인의 어머니는 딸이 시집갈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쓴담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만일 남편을 왕으로 섬긴다면 너는 분명코 여왕이 될 것이고  그러나 남편을 일이나 하는 사람
돈이나 벌어 오는 하인으로 여긴다면 너 또한 하녀가 될 뿐이다  또 네가 지나친 자존심과 고집으로 남편을 무시하면
그는 폭력으로 너를 다스릴 것이다   혹 남편의 친구나 친지가 방문해도 밝은 표정으로 정성껏 대접하면 너를 소중한
보석으로  여길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성경말씀처럼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시는 영적갱신을 위한 40일새벽기도회를  정성과 사랑을 다하는 신부처럼

행할때  여러분의 헌신과 간구가 반석에서 샘물이 솟고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가장 귀한 보석으로 인정받는

축복의 시간되기를 간곡히 기도하며 소망합니다

 

-예배사역팀 드림-

 

주일기도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때에 따라 변화하는 아름다운 자연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세상 무엇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죄 많은 우리들을 아무 죄 없으신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구원의 은혜로 세상에서 일주일을 살다가 다시 주님 앞에 나오게 하시니 이 또한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는 이 예배를 주님 기뻐 받아 주시옵소서.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예배에 집중하길 원합니다. 한없이 크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고, 이 세상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귀한 마음의 안식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남북으로 분단되고, 정치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교회는 주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하는데 전무하게 하시고, 지도자들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국민들을 섬기게 하옵소서. 어려울 때마다 힘을 모아 어려움을 이겨왔던 우리 민족의 지혜가 다시 한번 발휘되도록 주님 도와주옵소서. 특별히 북한 땅에도 주님의 귀한 복음이 넘치는 통일의 그날이 빨리 올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예배의 자리에 함께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큰 은혜에 감사하며 기도하는 성도들 있습니다.  또한 힘든 경제적 형편과 어려운 직장 일로 기도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이 시간 마음을 열어 주님께 나아갈 때에 주님 들으시고 각자에게 합당하게 응답하여 주옵소서.

또한 심신이 쇠약하고 질병으로 인해 몸이 자유롭지 못한 지체들도 있사오니, 주님 불쌍히 여기시고 주님의 크신 능력에 힘입어 치유 받는 귀한 시간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우리 가정의 아이들이 주님의 뜻에 합당한 아이들로 자라나길 원합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죄악과 부도덕한 것들에 영향 받지 않고, 주님께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우리 아이들로 양육되게 하옵소서. 우리 아이들이 잘 자라나 이웃과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능력 있는 아이들이 되게 하시고, 이 들 가운데에 세상을 움직이는 미래의 지도자들이 나타나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옵소서.

이곳 미국 땅에 특별히 새하늘우리교회를 세워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귀한 뜻으로 세워진 이 교회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뤄지는 평신도 사역을 통해 지역사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교회,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구원의 사역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도록 도와 주옵소서.  주님의 명령에 언제나 순종하여 우리가 이 땅에서 이웃하여 살아가는 여러 민족들을 주님 구원의 길로 인도는 교회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오늘 강단에 서신 장효수 목사님 말씀가운데 주님 함께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목사님을 통해 전해지는 복음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게 하시고, 듣는 이들에게 깨달음을 주어 그들의 인생이 변화되는 귀한 시간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목사님 사역에도 주님 언제나 동행하셔서 지치지 않고 항상 강건하도록 지켜주시고, 그 가정에도 함께하여 주옵소서.

이 예배를 위해 남모르게 수고하는 여러 성도님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찬양대의 찬양을 주님 기뻐 받아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구원의 확신

많이 부끄럽고  부족하지만  제가 외부에서 하는 봉사중 한가지가  호스피스 사역이 있습니다

오랜 투병끝에 의사로부터 시한부 통고를 받고  임종을 기다리는 환우를 보면서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인간적인 안타까움과  연민, 때론 당황스러움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시는 분도 있고   전혀 종교와는  무관하신 분도 계시고,그야말로 불교로 천주교로 기독교로 두루 돌며 방황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40대 후반의 어느 여성분은 흡사 소설이나 영화속에서나 볼 듯한  아름답고 청조한 모습으로  집안 분위기까지 아주 단정하게  꾸미고  제목은 모르지만 흐르는 음악소리마저  방문한 나를 숙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60대 중반의 몬트레이에 거주 하셨던 여집사님은  그는 화가였고,  남편의 직업이 외교관이라 세계 각처를 돌며 남편 뒷바라지에 일생을 바치셨던 분 이었습니다.

제가 그 댁을 방문 했을때는 그분은  눈동자마저  움직이기가 힘드셨습니다.온 가족이 임종을 맞기 위해 다 모였고 , 그 분은  죽음의 직전까지  흐트러진 모습이 싫다고  딸을 불러 머리손질을 하시고  휠체어에서  우리를 반가이 맞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힘든 입을 열어 고맙다고 말씀하시기에 지금까지 사시면서 제일 고맙거나  감사한 일 이 무었이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분은 서슴없이 말씀 하셨습니다.    옆에 서 계시는 남편의 만남과 늦게나마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일 이라고 고백했습니다 .    그분은 이틀후에 평소 모습데로 아주 단아한 모습으로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물론 그 분들은 구원의 확신도 있었고 실제 구원 받으신 분들입니다. 제 방문 목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 분들이 거부감없이 구원의 확신을 갖고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 입니다.  그런데 수 많은 환우를 방문하면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믿으면서도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실제로 구원을 받았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죽음 앞에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비단 그분들뿐만 아니라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예나 지금이나 구원의 확신과 구원 받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혼란스러워 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 편에서 갖는 것이 아니고  우리 편에서 갖는 것이고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 뜻데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자들을 위하여 사도요한은  요한일서 5장13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선명하게 말씀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구원 받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확실하게 발견하고 깨닫는 것!  그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내일 전교인 함께 모여 드리는 새벽재단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예배사역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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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오늘은 어땠어? – 한희영

엄마, 오늘은 어땠어?

                                                                                                                                   한희영(재미한국학교협의회부회장)

“엄마, 오늘은 어땠어?” 아들이 차를 타면서 늘 물어보는 말이다. 어법이나 존칭에 다소 맞지 않지만 난 아들의 이 한마디가 참 좋다. 우선은 내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좋고 그 억양이 따뜻해서 좋다. 중학교에 가면서부터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보는 엄마에게 ‘하이 맘’ 다음에 늘 하는 질문이 되어버렸다. 처음엔 나도 건성으로 대답하다가 이러면 이 대화도 언젠가 끝나겠다 싶어서 너를 보내고 하루 동안 무엇을 했는지 조목조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의 소소한 일상이 아이에게 무슨 재미가 있으랴마는 사실은 내 대답 뒤에 아들의 학교생활을 짧게나마 듣고 싶은 마음에 즐겁게 이야기 해 본다. 그러나 아들은 항상 한마디 ‘괜찮았어’라면 끝이다. 생각해보면 살얼음판 같은 하이틴 남자아이들의 엉뚱함과 그 어정쩡한 의리에서 나오는 온갖 사고들을 듣노라면 ‘괜찮았어’ 만큼 감사한 대답이 어디 있으랴.

언젠가는 아이에게 그날 커피브레이크 테이블에서 나눈 어느 자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분의 시어머님은 몸이 불편하셔서 널싱홈에 계시는데 남편이 세끼 식사를 양식으로 드셔야 하는 어머니를 위해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널싱홈으로 매일 퇴근을 해서 어머님과 함께 저녁을 먹고 온다는 것이다. “너도 나중에 그렇게 해줄래?” 하고 농담처럼 묻는 나의 물음에 아이의 대답은 “엄마는 안 하잖아요” 였다. 엄마의 행동이 아이에겐 거울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매년 두 달을 미국에서 보내시는 할머니를 생각하며 엄마도 일 년에 두 달은 자기 집에 와서 보내라고 한다. 올해는 건너뛸까 하고 망설이던 내게 아들의 말은 서둘러 비행기표를 예약하게 하고 말았다.

와인의 품질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테루아르(Terroir), 즉 포도밭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이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테루아르는 부모이다. 내가 보내는 이 하루가 아이에게 테루아르가 되어 그 인생을 완성해간다고 생각하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는 오늘도 내게 물을 것이고 나는 대답할 것이다. 나의 대답 속에 아이가 살아내기 바라는 삶이 있어야 한다. 내가 그 시간을 먼저 살고 있어야 한다.

 

 

중년, 그 낯선 나이-한희영

중년, 그 낯선 나이

한희영

세상의 나이가 중년이라치면 나의 리얼에이지(real-age)는 몇 살일까? 마이클로이젠교수가 ‘You: the Owner’s Manual’이라는 책을 통해 발표해 화제가 되었던 이 개념은 평소 본인의 건강관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건강나이, 즉 이것을 리얼에이지라 한다. 세상 나이와 또 다른 나이는 작년 연말에 누리꾼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정신연령이 있다. 테스트 자체가 간단하여 쉽게 결과를 알 수 있는 테스트였는데 만약 자기중심적 성향에 저질 체력이라면 리얼에이지던 정신연령이든 우리를 슬프게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항상낯선  나이는 달력나이이다.

40대 초반을 넘길 무렵 남편이 투도어 오픈카 타령을 한 적이 있다. 젊음을 이렇게 가족 밴을 끌다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고 이런 남편을 두고 딸아이는 드디어 아빠가 Midlife crisis라며 걱정을 했다. 이젠 그런 이야기조차 추억 속에서 미소 짓게 하지만 늘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한 자각은 낯설고 새삼스럽다. 지난주 근처 대학에 post-doctor 과정으로 나와 있는 조카의 딸아이 돌잔치에 갔다. 그곳에 모인 모든 하객 중에서 우리 부부가 가장 나이가 많아 식순에 의해 덕담을 해야 하는 입장에 서고 보니 나이가 주는 위치가 여간 씁쓰름한 것이 아니었다.

1990년에 우디앨런 감독의 ‘Alice’라는 영화가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중년의 위기’라는 제법 근사한 제목을 달고 상영이 되었는데 풍족한 중년의 상류층 여주인공이 어느 날 등이 아파 중국 의사를 찾아가면서 시작되는 중년판 이상한나라의  엘리스다. 이 중국의사 Dr. Yang이 처방해주는 신비의 치료 약으로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잃어버렸던 중년의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내 맘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은 나 역시 중년의 위기에서 예외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Dr. Yang이 떠나기 전 주인공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녀에게 해준 이야기가 오늘 긴 여운으로 남는 이유가 잊고 살던 중년의 그 낯선 나이 때문일는지,

 

“험난한 인생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것과 내가 현재 해야만 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춰서 올바른 결정을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배우고 가르치면 기쁘지 아니한가- 한희영

배우고 가르치면 기쁘지 아니한가!

한희영 (재미한국학교협의회 부회장)

중학교 한문시간의 주관식답 중에 하나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였다. 그 시대 교육정책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나는 도저히 이 공자의 문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이해 할 수 없던 문장이 요즘은 절절하게 와 닿는다. 이번에 갖은 재미한국학교 협의회 교사연수회에서도 그런 기쁨이 우리를 찾아주었다. 우리 한민족의 5천 년 역사 중에서 가장 어렵고 마음이 아파 열어보고 싶지 않았던 구한말의 역사적 의미와 시대 상황에 관하여 조규태 한성대학교 교수님은강의해 주셨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친 한민족의 불운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정확하게 알고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는 강의는 요즘 일본에서 흘러나오는 망언들로 분하던 마음이 추스려지면서 주먹이 불끈 쥐어짐을 느꼈다.

이어진 Chad Yoo강사의 Acculturation Process(이중문화적응)에 관한 심리학 강의는 코리언아메리칸 학생들의 스트레스를 이해하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특히 우리 아이들이 한국의 청소년들에 비해 스트레스 지수가 훨씬 높다는 통계나 미국문화화(Assimilation)가  높은 학생일수록 비행 청소년이 될 확률이 더 높다는 통계, 그리고 한인 부모들이 2세 자녀를 다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오해라는 설명 등은 현재 나의 자리를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각 한국어 수준별로 이루어진 4개의 분반 시범 강의 또한 각 학교에서 추천된 재능 있는 교사들이 그의 노하우를 모두에게 전해주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도 일찍 여의고 불운한 유년기를 보내었던 공자는 어떻게 논어의 처음을 배움의 기쁨으로 시작했을까? 그가 주장한 ‘예(禮)’는 우리 삶의 모든 총체적 사상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시작이 배움인 것이다. 이런 배움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공자는 진작 알고 있었던 것이다. ‘참된 한국어교육은 공부하는 교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협의회 표어처럼 오늘날 공자가 한국학교 교사였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배우고 때로 가르치면 기쁘지 아니한가!’

남몰래 흘리는 눈물- 이미애

남몰래 흘리는 눈물

이미애 집사

“여보, 여기 빨리 와서 이것 좀 봐”

몇년 전, 조금은 상기된 남편의 목소리가 저녁을 준비하는 나의 발걸음을 잡아 당긴다.

그 날 사온 DVD에서 나오는TV 화면은 이탈리아 작곡가 도니제티의 희극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 그 유명한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인공 네모리노가 마을 아가씨 아디나에게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발견하고 부르는 서정적이며 구슬픈 곡조이다.  남편이 나를 부른 것은 그 아리아를 부르는, 그 당시 떠오르는 테너 롤란도 비아존의 목소리와 그 눈빛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짝사랑하던 여인으로 부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발견한 그 벅찬 감격을 소박하고도 순수한 그리고 수줍기까지 한 눈빛을 담아, 갓 씻은 아기의 살결만큼이나 향기롭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표현하고 있었다. 예전의 그 어느 테너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순수함이, 순박함이 목소리와 함께 묻어나온다. 그 아리아가 끝나자 객석에서 앵콜을 요청했다. 오페라 공연 도중에는 보기 드문 앵콜이란다. 마음좋게 생긴 비아존은 다시 한번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절절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 아름답게, 애달프게 쏟아낸다. “ Una furtive lagrima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negli occhi suoi spunto… (그녀의 두 눈에서 흘렀소…) ……”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껴안고 가는 것이리라. 모든 것을 껴안는다는 것이 그렇게 가슴 아픈 일인줄 모르고 시작한 사랑. 사랑의 기쁨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잠시, 가슴에 품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안타깝고 아팠던 시간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황망하게 서 있었던 때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남몰래 흘렸던 눈물이 젖어든 그 구비구비에 네모리노가 쏟아내는 사랑의 언어의 선율만큼이나 구슬픈 역사가 남아있다.

남편을 남자친구로 처음 만난 때부터 지난 33여년의 함께 걸어온 시간속에서 남몰래 흘렸던 눈물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내가 숨죽여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항상 내곁에서 나보다 더 가슴 아프게 나를 위해 눈물흘리시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의 그 사랑이, 남몰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던 그 상황들이, 나의 모습을 더 아름답게, 나의 품을 더 크게 빚어가시는 아버지의 훈련 과정인 것을 알게 하셨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 앞에 앉아서 남몰래 많은 눈물을 흘린다. 내 가슴속에 담겨 있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고단한 모습들을 아버지 앞에서 풀어놓을 때마다 안타까와서,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리고 이 자리에 있게하신 그 사랑에 감사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