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

동역자

제가 대학생들을 목회할 때 그 친구들의 연애에 대하여 여러 상담을 해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권면이 연애를 하면, 여자친구 혹은 남자친구만 만나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럴수록 자기와의 시간만 고집하지 말고, 다른 친구들과 나누는 시간을 계속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라고 했습니다. 또 한가지는 그 여자(남자)친구를 잘 알기 위해서, 그 친구의 친구들을 함께 만나라고 했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사람들, 그 사람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가 중요합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된 사람들이면, 함께 된사람으로 다듬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실력있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능력이 약해지고 자신감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동료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직장이나 같은 부분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함께 일하는 것이지 같은 정신(spirit)과 비젼을 가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동료는 때로는 경쟁자(라이벌, rival)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말하는 동역자는 선교적인 일을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하는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비젼을 함께 공유한 사람들이 동역자관계입니다. 경쟁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역자들의 협력이 있었기에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더 귀한 고백은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동역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감사의 예배를 함께 드리기 원하는 집사님께

감사의 예배를 함께 드리기 원하는 집사님께

캘리포니아의 가을이 곱게 물들고 있습니다. 지난 한 주일 동안 비가 내리고 찬 날씨가 계속되더니 길가의 단풍잎들이 붉게 그리고 노랗게 채색하고 있습니다. 찬 기운을 받아야 산과 들 그리고 길가의 나뭇잎이 곱게 물이 드는가 봅니다. 해가 떨어지는 노을과 어우러진 물든 길가의 물든 나무들이 참으로 아름다워 운전을 멈추게 합니다. 이렇게 2015년도의 가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집사님

주 안에서 모든 가족들이 평안하신지요? 이 아름다운 가을에 우리 믿음의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감사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슬픈 현실이 참으로 마음 아프게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생명을 빼앗고, 짓밟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지구촌 곳곳에서 비극적인 생명의 잃어버림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끝난 것이 아니라, 진행형이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이 그들의 최종 종착지라고 하니 마음에 걸립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왜 죽는지도 모르고 생명을 내려놓은 그들이 불쌍하고, 그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살아가야 하는 그 가족들의 더 무거운 마음이 아픔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있고, 감사절을 지내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텐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감사를 어떻게 찾고 받아들여야 할지 가슴 먹먹하기만 합니다. 파리에서의 엄청난 테러가 있었고, 그 테러를 응징하기 위한 군사적 공격으로 인해 파리보다 중동의 수많은 시민들이 생명을 잃은 것을 보며, 악은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는 성경의 말씀을 깊게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테러의 방식이 악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한데, 왜 그들이 그런 일을 하였을까 하는 또 다른 반성과 성찰이 있을 때에 테러를 단절시키는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악은 악으로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 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 12:19)는 주님의 말씀은 읽으면서도, 오히려 악으로 보복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합리화 시키는 우리 자신들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절실해지는 감사절기입니다.

이런 세상의 아픔 가운데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미국에서 첫 번째 추수감사예배를 드렸던 청교도들은 좋은 상황과 풍성한 열매로 드린 것이 아니라, 정말 열악한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첫 번째 수확물이었기 때문에 많이 부족했을 것이고, 익숙하지 않은 자연환경 속에서 얻어진 농산물이었기 때문에 형편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하지 않고 감사의 조건으로 받아들여 감격의 감사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 감사예배가 있었기 때문에, 두 번째, 세 번째 감사예배가 있었던 것입니다.

집사님,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들도 있었지만, 감사예배를 드리면서 믿음의 마음을 열어 감사의 조건을 찾아 감사를 드리는 복된 감사절예배가 되어지면 좋겠습니다. 지난 11년 동안 믿음의 백성들과 함께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사랑을 나누며 삶을 나눌 수 있었던 은총이 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사이지요.

2015년 11월 추수감사절에 장효수 목사

편견

편견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들에게 기억되는 끔찍한 사건중의 하나가 버지니아 공대(Virginia Tech)에서의 총기난사 사건입니다. 한국국적이며 미국 영주권자인 조승희라는 학생은 아직 구체적인 동기가 파악되지 못했지만, 2007년 4월 16일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학교에서 총기를 가지고 무차별 난사를 해서 젊은 생명 33명이 생명을 잃었으며, 29명이 큰 부상을 당했던 큰 사건이었습니다. 시애틀에 교육을 갔다가 아침 식당에서 속보를 보며 마음 졸이던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우리 한인사회는 큰 부담을 가졌습니다. 한국국적의 영주권자였기 때문에 미국사회에서 한인에 대한 편견이 생기고, 큰 차별이 생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사회는 기대와는 달리 조승희라는 한 사람의 문제이고, 범죄로 받아들였으며, 언론들은 한인이라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도 했습니다. 개인의 문제이지,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는 관점이었습니다. 걱정하는 한인사회에 대하여 언론이나 정치가들은 한인사회가 민족적으로 걱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며칠전 프랑스 파리에서는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 국가(IS)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이 있었습니다. 극장을 비롯한 대중들이 모인 공간에서 일으킨 이 사건은 사망자만 129명이 되고, 훨씬 많은 사람들이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망자들의 가족들은 평생 씻어지지 못한 고통을 가지고 살아갈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IS 테러리스트들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목숨을 내 놓고 했겠지만, 그러나 아무 죄도 없는 그들의 희생은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 받아줄 수 없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인 사건을 경험하면서 이 범인들이 무슬림, 아랍계라고 해서 무슬림이나 아랍계, 중동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면 안됩니다. 그들은 무슬림의 작은 한 부분이지 전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편견을 가지면 더 분열 속에서 갈등은 계속됩니다.

 

변함없는 마음

변함없는 마음

공자는 논어에서 사람이 40이 되어서는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여 불혹(不惑)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일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옛날에는 불혹의 나이에 사람을 판단해도 괜찮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인생은 그렇지 못합니다. 젊은 날 건강한 생각과 좋은 의식을 가졌던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변질되어 예전의 생각과 다른 말을 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요즘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면 옛날도 아니고 몇 년전 자신이 이야기하고 사람들 앞에서 약속했던 것들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모른채 하고, 거짓말을 하며,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보면, 인간의 연약함(weakness)을 보며, 거기에서 인간의 악함(evilness)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의 악함에 세상이 익숙해져 가는 것을 봅니다. 작은 악함과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문제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작은 모래나 큰 돌이나 심판의 바다에서는 똑같이 가라앉습니다. 변함없는 마음, 변함없는 생각, 변함없는 인생은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과 기대를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제 자신을 나도 모를 때가 있기 때문에, 변함없는 생각과 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이삭이 태어납니다. 이때가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그들은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었고,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불가능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위해 약속대로 아들을 허락합니다. 인간의 눈에는 불가능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얻은 아들을 제물에 바치라고 합니다. 그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변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첫번째의 기적은 믿고, 두 번째의 기적은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Silence Exodus

Silence Exodus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가정들은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집을 떠나게 됩니다. 가능하면 집에서 멀리 가서 독립적인 생활을 하려고 하는 마음들이 젊은이들의 마음입니다. 전혀 문제될 것도 없고, 오히려 건강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한인가정들은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대부분 부모와 아이들이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때로는 아이들이 주일 혹은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부모님들의 권면과 설득 그리고 협박 등을 통해서 교회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목회자들과 학부모들은 고등학교와 교회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으로 간 아이들이 지속적인 교회생활을 하는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의 간섭없이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세상의 영향력이 강한 학교 캠퍼스에 지내고 있기에, 부모님들과 함께 교회생활을 했던 고등학교 때까지의 신앙생활을 계속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마음 아픈 일이지만, 전문가들의 통계에 의하면 교회생활을 하던 아이들의 10%만이 대학에 가서 지속적인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죄송하고, 하나님 앞에 죄스런 마음입니다. 영어권 2세 한인들을 담당하는 목회자들은 이 현상을 Silence Exodus(조용한 출애굽) 이라고 했습니다. 대학에 가서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심각하게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한인목회자들의 기도가 필요하고,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 유스그룹을 졸업한 아이들이 대부분 대학에 가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의 거대한 영향력과 세상의 가치관 앞에 우리 아이들이 지켜 갈 수 있을지 염려되기에 우리 아이들을 위해 진심으로 이겨나가도록 기도합시다.

힘 빼기

힘 빼기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우리집은 두 번이나 신축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마다 동네의 목수 아저씨들이 오셔서 나무들을 잘라서 기둥을 세우고, 문짝을 만들고, 지붕공사를 하는 것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지금은 기계들이 좋아 공사를 할 때 첨단의 기계들을 사용하여 일을 하지만, 그때는 정말 톱과 망치 그리고 못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그때 그 목수 아저씨들의 망치질은 어린 내가 볼 때 감탄스러웠습니다. 정확하게도 망치질을 하지만, 몇 번만 망치질을 하면 마무리되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도 망치질을 여러번 시도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이가 들어서 망치질을 배웠습니다. 강하게 잡고, 끝까지 힘있게 망치질을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부드럽게 잡고, 힘을 주지만, 망치가 못 머리를 칠 때는 힘을 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해야 하는 모임들이 있습니다. 전에는 열심히 노래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힘을 다하여 했는데, 얼마 못가서 목이 쉬어 계속하지 못한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은혜스럽게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바른 발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하시는 한 분이 비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목에 힘을 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노래를 모르는 사람들이 목에 힘주고 노래하는데, 목에 힘을 주면 힘이 들어 목이 바로 쉬고, 고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망치질, 노래 뿐만 아니라 골프도 테니스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우리 믿음생활에 있어서 ‘힘 빼기’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지름길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힘,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는 힘, 내가 할 수 있다고 하는 힘, 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인한 힘을 빼는 훈련과 실천이 있을 때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힘을 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이 대신하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

그 이후에

한국의 김종학 TV 프로듀서(PD)가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작품은 대단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뿐만이 아니라 한국사람들을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당겼던 사람입니다. 청년 대학생들을 목회할 때는 여명의 눈동자를 시청하지 않고는 대화를 할 수가 없었고, 그 다음의 모래시계는 귀가시계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역사와 사회 그리고 사랑을 잘 보여주었던 모래시계는 지금도 유명했던 주제곡과 아름다운 장면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 모래시계에 ‘나 떨고 있니?’라는 명대사가 있지만, 나에게 남아있는 명대사는 교도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박태수와 친구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검사 강우석의 대화입니다. 박태수는 오래전 광주사태 때 자신은 의로운 시민군으로서, 강우석은 시위를 진압하는 잔인한 군인으로서 만났다는 것입니다. 강우석은 몰랐지만, 박태수는 강우석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태수는 그 이후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강우석은 그 광주의 비극을 경험한 이후 정의의 길을 걸었고, 박태수는 조폭의 생활을 시작해서 끝내는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합니다. 종종 그 박태수의 대사를 생각해보곤 합니다. 어떤 큰 경험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 정말 책임있는 삶을 살았는가의 문제입니다. 좋은 일이든 힘든 일이든, 고통스러운 일이든 감동스러운 일이든 한 사건이 있은 후의 삶은 우리의 삶을 더 좋게 만들 수도 있고, 더 나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에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여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배 후의 삶입니다. (After the worship) 예배 후의 선택적인 삶이 우리의 삶을 좋게도 만들 수 있고 나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