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보복

아름다운 보복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흑인교회의 총기난사 사건은 미국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이나 약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 청년의 총격으로 인해 성경공부하기 위해 모였던 교인과 목회자 9명이 마음 아픈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성경공부하는 곳에 들어왔던 그 백인 청년은 교인들의 친절함으로 머뭇거렸다는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그들에게 주저없이 총격을 가했습니다. 그리고 희생당한 그 목사의 장례식이 있었고, 그 장례식에 오바마 대통령과 바이든 부통령 그리고 5천여명의 사람들이 추모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날 오바마는 추모연설에서 이 비극적인 사건이 인종적 갈등을 해소할 다리로 사용하길 원한다는 이야기를 했고, 이런 비극적 사건으로 분열과 갈등을 만들려고 했지만, 그 뜻을 이룰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바마는 추도연설 마지막에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함께 부르며 인종차별을 함께 이겨나가자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4년전 여름, 복지국가 첫 번째인 노르웨이에서 엄청난 테러사건이 있었습니다. 극우주의자였던 브레이비크라는 청년이 정부청사를 폭파시켜 7명의 생명을 빼앗았고, 청소년캠프를 하는 섬으로 가서 도망갈 수 없는 상황속에서 총기난사를 하여 90여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극단적 사고 속에서 극단적 행동을 한 것이었고, 그로 인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오슬로 시장은 슬픔에 빠져있던 시민들에게 이제 우리는 이 테러에 대하여 보복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더 큰 관용과 더 큰 민주주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마음 아픈 것은 노르웨이 브레이비크의 기록에 다문화주의에 부정적인 국가로 한국과 다른 두 나라를 말하며 한국을 찬양하고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오히려 보복하지 않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들 또한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의 막힌 담을 헐어버린 분입니다. 이 세상에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소탐대실

소탐대실

메르스(MERS) 때문에 한국이 난리였습니다. 처음에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정부에서 보고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한 주가 지나고 나서 확산되어지는 뉴스를 보았을 때 약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주간만 지나면 진정될 것이라고 안심하라고 했습니다. 국민들이 메르스를 공포같이 느껴지니 유언비어에 속지 말라고, 괜찮다고 정부의 담당자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감염된 병원들이 나오고, 메르스에 확실하게 감염된 확진자가 나오고, 확진자들과 접촉했던 사람들인 자가격리자들이 늘면서 2차, 3차 그리고 4차 감염자 보도가 되고 있습니다. 원래 다른 병을 가지고 있고, 노약자였던 30여명이 메르스에 사망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메르스는 이미 예견된 전염병이었고, 언젠가는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전염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르스는 한국사회를 흔들어 놓았고, 어떻게 공이 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시작은 한 사람의 시민이었습니다. 중동 바레인에 다녀왔던 1번 환자가 메르스 혹은 감기 증상이 있다고 보건당국에 이야기 했는데, 사우디아라비아 나라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되었습니다. 몸이 좋지 않자 한 병원에 갔었고,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하자,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갔는데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1번 환자는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되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감염된 사람들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급하게 감염된 것입니다. 이로 인한 국가적인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결과적인 것이지만, 그 한 명, 1번 환자를 잘 관리하고 치료했다면, 지금과 같은 큰 난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한 명, 국민 전체에서 보면 지극히 작은 수이지만, 살아있는 숫자였습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한국속담, 그대로입니다.

작은 것을 무시한다든지, 작은 것을 얻으려고 하면, 큰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버릇도 마찬가지요,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죄도 똑같습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메마른 땅, 사용할 수 없는 물

메마른 땅, 사용할 수 없는 물

40년만에 찾아온 한국의 가뭄이 농민들의 가슴을 메르스보다 더 타들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갈라진 논에서 모가 말라 죽어가고 있고, 저주지가 바닥을 보인 정도가 아니라,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신문의 사진을 보며 함께 마음이 아파집니다. 며칠전 신문에 우리 고향에 대한 기사가 나왔는데, 금강과 15Km 떨어진 한 동네에 지대가 높고 하천이 먼 이 마을에서 물대기가 끝난 논은 농경지의 3분의 1도 채 안된다고 합니다. 올해 밭농사를 포기한 농민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저수지는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금강에 가득하게 고인 물은 그림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에는 4대강이 있습니다. 4대강은 22조원을 쏟아 부은 엄청난 토목공사였습니다. 이 4대강을 만들 때 목적은 가뭄과 홍수 예방이라고 했습니다. 4대강을 만들 때 말들이 많았지만, 홍수와 가뭄 등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해서 농민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도하는 기자는 심한 가뭄인데도 불구하고, 4대강 물은 무용지물이라고 했습니다. 4대강에는 물이 풍성해서 찰랑이고 있지만, 너무 모아 놓아서 녹조까지 생기고 있지만, 실질적인 가뭄에는 사용할 수 없는 물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풍성한 물이 모여 있다고 해도 쓸모없는 물은 의미가 없습니다. 넘치는 물을 사용할 수 없는 농민들의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농민들은 농사를 지어서 큰 돈을 벌려는 마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근본이 되는 양식을 위한 논을 놀리는 것이 죄스런 마음에서 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4대강에 찰랑찰랑한 물, 넘치는 물이 있음에도 사용하지 못하는 물을 보면서, 한국교회를 보고 있습니다. 풍성한 좋은 물이 있음에도 논의 모가 말라가고, 저수지 바닥이 갈라지는 모습이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가슴이 답답합니다. 더 많은 교인들을 채우려고 하는, 그리고 저장만 하고 있는 4대강 교회들의 내일이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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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젊은이들이여

한국의 젊은이들이여

“내 사랑하는 한국인 젊은이들이여, 제발 젊은 날부터 바른 길을 걸어가고 편한 길이 아닌 힘든 길을 선택하라. 특히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크리스천 젊은이들은 제발 젊은 날부터 세상의 길을 선택하지 말고, 힘들고 어려워도 바른 길을 선택하라. 그리고 세상을 위해 쓰임받을 때까지 변함이 없어야 한다. 제발 그런 사람들이 되어주어라. 우리 시대는 어쩔 수 없지만, 20년 후, 30년 후 우리 민족의 희망을 바라보고 싶으면, 지금부터 편한 길이 아닌 힘든 길, 영광의 길이 아니라, 희생의 길을 선택하고 살아가야 한다. 세상이 비웃고, 왜 힘든 길 선택하느냐 끊임없는 유혹을 하겠지만, 마음 굳게 먹고 흔들리지 말라. 세상이 가는 문은 넓고, 길은 넓다고 했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야 하는 문은 좁고, 길은 좁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사람들이 가는 넒은 길을 포기하고, 세상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하라.”

얼마전 한국의 국무총리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수없이 많은 지도자들이 청문회에 나와 정부 최고위직을 맡기 위해 질문을 받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의 최고 지도자들은 젊은 날부터 최고에 이를 때까지 정말 바른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없는지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법은 어기지 않았다고 하면서, 편한 길을 찾아, 성공의 길을 찾아, 물질적 풍요를 찾아 열심을 다한 그들의 삶은 진정성이 없어 존경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바르지 못한 삶들이,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이런 삶을 살아야 최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학습시키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지금은 과거의 결과이기에 지금 이 시대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젊은이들이,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지금부터 힘든 길을 따르는 선택적 삶이 있고, 그 선택적 삶을 훈련할 때, 지금의 결과는 20년, 30년 후에 열매 맺어질 것입니다.

코호트격리와 우리의 영웅

코호트격리와 우리의 영웅

코호트격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에 메르스 전염병 때문에 새로운 전문용어들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코호트라는 말은 비슷한 특성을 가진 집단이란 뜻으로, 코호트 격리라는 말은 병원에서 감염병 환자가 발생했을 때, 추가 감염을 막기 위해 병동 전체나 일부 병실을 의료진, 입원환자와 함께 봉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했던 의료진까지 감염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염시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코호트 격리를 하게 된 것입니다. 환자들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전염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의료진들까지 격리된 것이고, 단순한 격리가 아니라, 환자들까지도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격리된 것입니다. 확진된 환자들 때문에, 자동으로 메르스 격리대상자가 된 것입니다. 의료진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어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으려 숨어서 출근하고, 숨어서 퇴근한다고 합니다.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든 마스크를 눌러쓰고, 손이 부르트도록 씻고, 가운을 하루에도 몇 번식 갈아입는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의료진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에, 메르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의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모든 의료진들이 묵묵히 환자들을 돌보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가운과 마스크를 하고 통제구역에서 메르스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고 헌신하는 의료진들을 보면 울컥해집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웅들입니다. 최선을 다해 메르스가 내 환자들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맨 머리를 들이밀고 싸우겠으며, 더 악착같이, 더 철저하게 저승사자를 물고 늘어지겠다고 하는 한 간호사의 말이 가슴 벅차게 합니다.

지금 한국의 의료진들은 이 세상을 위한 십자가를 지는 우리 시대의 영웅들입니다. 통제구역 앞에 꽃다발이라고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들의 발이 두려움에 뒷걸음치지 않도록 박수와 기도를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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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삶이 주는 희망

어설픈 삶이 주는 희망

오바마 대통령의 첫 번째, 두 번째 취임식과 퍼레이드는 대단했습니다. 그때, 그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군중들의 환호와 박수 속에서 걸어가는 오바마 대통령과 영부인은 당당했습니다. 수많은 경호차량과 경호원들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지나가는 대통령 차량행렬 또한 엄청났습니다. 빈틈이 없는 세련된 행렬이었습니다. 한국의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의 취임 행렬도 대단했습니다. 청와대에서 취임식을 하던 여의도까지, 여의도에서 다시 광화문과 청와대에 이르는 차량 행렬은 엄청났습니다. 예전의 대통령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경찰과 경호 담당자들의 차량과 에스코트 행렬은 권력과 권위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를 알려주는 메시지였습니다. 로마의 황제의 행렬은 지금의 차량은 아니지만, 고대 시대 권위의 상징인 백마를 타고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의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로마 총독이 있었고, 총독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여주며 권위와 권력을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지도자와 인간의 내면에 있는 권위와 권력이 아니라, 만들어낸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와 권력이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어설픈 행렬이었습니다. 제자들의 겉옷을 얹은 어린 나귀를 타고 사람들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꺾어 바닥에 깔고 환호하는 가운데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이 기대하는 권위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로서 로마 황제나 총독의 화려한 모습을 기대했던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화려하고 세련되었던 로마 황제나 총독은 역사에서 사라졌고, 어설픈 행렬을 했던 예수님은 온 세상의 가장 강력한 능력과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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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은 스님

무릎을 꿇은 스님

월남 전쟁은 한국전쟁만큼 서로에게 아픔이 있는 민족간의 싸움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한국전쟁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남은 자들은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월남전쟁은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하는 미국이 참전을 했고, 그 미군과 함께 한국군이 파병이 되어 오랜 시간에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베트남 공산주의자들과 싸웠던 한국군들의 용맹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전설이었습니다. 수많은 미군과 한국군의 생명이 베트남에서 잃었지만, 결국 전쟁에 패해서 미군과 한국군은 철수를 하고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전쟁중 한국군의 용맹함이 뛰어났지만, 전투를 하고, 베트콩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민간인들과 접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수많은 베트남 민간인들이 한국군에 의하여 희생당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의 살아남은 자들이 증언하고 있고, 참전했던 군인들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며칠전 한국에서, 월남전에서 희생당한 월남 사람들에 대한 증언이 있었습니다. 탄씨와 런씨라는 두 분이 자신들이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현장에서 겪었던 일들과 상황에 대하여 증언을 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역사의 진실을 들려주려 한 것이지 한국 사람들에 대한 원한이나 증오를 부추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명진스님이 그들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를 했습니다. 참전했던 경북대의 류진춘교수는 백마부대 대원으로 참전했다고 하면서, 민간인 학살에 참여한 것을 인정하고, 사죄를 했습니다.

평화의 세상은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죄와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용서가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을 수 있음은 진정한 용기이고, 진정 용서받을 수 있는 사죄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투자에 대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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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단체인 캘리포니아 인다우먼트(CA Endowment)가 ‘Do the Math’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만든 그림이 있습니다. 반쪽은 감옥의 재소자들이 입는 옷을 입었고, 다른 반쪽에는 학사모를 쓴 졸업가운의 젊은이 사진입니다. 재소자의 옷의 반쪽에는 감옥, 62,300불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학생의 옷 반쪽에는 9,100불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감옥에 있는 한 재소자(inmate)에게 들어가는 경비가 연간 62,300불이고, 공립학교의 한 학생에게 일년동안 들어가는 예산이 9,100불이라는 말입니다. 캘리포니아의 교육 예산이 너무 약하다는 것을 알리고, 주정부 예산에서 교육 예산에 더 많이 투자하라는 비영리단체의 강력한 외침입니다. 뿐만 아니라, 재소자들을 위한 경비와 교도에 막대한 예산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교육투자 확대를 통해 범죄자를 미리 막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언론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학생 1명을 잘 교육시켜 범죄를 극복할 수 있다면, 미래에 사회비용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지금을 위한 인간의 노력이 아닙니다.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내일 그리고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지금은 과거의 결과이고, 지금의 결과는 미래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작은 돈을 더 투자하게 되면 투자한 만큼 미래는 더 희망이 있게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훨씬 많은 돈이 사회악을 위해 지출이 되어야 합니다.

범죄가 아니더라도, 우리 삶에는 지금 더 투자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건강도 지금 더 투자해야 하고, 책을 읽는 것도,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도 지금 투자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미래에 큰 손실이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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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 예비군의 절망

한 젊은 예비군의 절망

며칠전 서울의 한 예비군이 동원훈련에 참여했다가 동료 예비군에게 총기를 난사해 3명이 숨지고 여러명이 큰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1968년 예비군이 창설된 이후 처음이라고 하기에 예비군 훈련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문제가 있는 예비군이 훈련에 참여했기에 사고가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군대 생활을 하던 30년 전에도 그런 사고들이 있었고, 지금도 군대 내에서 총기 사고는 종종 있는데, 군대를 제대한 24살의 젊은 친구가 예비군 훈련에서 사고를 냈기 때문에 크게 보도가 된 것이었습니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총기 난사 후 자살을 한 그 친구의 유서였습니다. 그는 왜 살아가는지 모르겠다고 했고, 무슨 목적으로 사는지도 모르겠다고 하는 그 젊은 친구의 절규 같은 목소리였습니다. 그냥 살아있으니깐 살아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자아감, 자존감 이런 것을 싫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 죽여버리고 자살하고 싶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비참한 총기사고는 왜 살아가는지 모르는, 삶의 목적이 없이 살아가는 한 젊은이의 나약한 판단이 낳은 결과입니다. 삶의 목적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갔다면, 그 청년은 그런 마음 아픈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건강한 자존감을 만드는 것은 분명한 삶의 목적입니다. 나는 누구이고, 왜 사는지를 아는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제품이 아닌 작품이기에 한 인간이라는 하나님의 작품에는 작가인 하나님의 의도, 다시 말해 목적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 깨닫는 것이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최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룩한 자존감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와 지배자

지도자와 지배자

며칠 전 한국 3대 종교인 불교와 천주교 그리고 개신교 학자들이 모여 대화모임을 가졌습니다. 신학교 때 함께 공부했던 친구가 그 전문가 포럼에 참여하여 발표를 했기 때문에 관심있게 기사를 읽었습니다. 종교를 걱정하는 불자와 그리스도인의 대화라는 주제로 모였는데, 그들의 공통적인 목소리는 ‘각 종교의 지배층은 있지만, 지도층은 없습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권위주의가 난무합니다’, 였습니다. 그래도 사회의 건강함을 지켜나가야 하는 각 종교가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 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권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 진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이나 불교 그리고 개신교에 있어 진정한 지도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지도자는 부족하고, 지배자들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우리 시대에 불교나 카톨릭 그리고 개신교에 국민들이 존경할만한 지도자가 없는 현실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잘못된 체제에 저항하며, 자신을 바치는 희생을 바칠 때 진정한 지도자가 나오는 것인데, 우리 종교계에 그런 인물이 있느냐 하는 마음 아픈 질문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은 본능적인 감정입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인간 안에 내재된 본성입니다. 죄의 일종입니다. 이 죄를 깨닫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본성을 이기게 해주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자 주님의 삶입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들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절망을 공감하신 분입니다. 그 공감능력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치유하셨으며, 그들에게 삶의 희망의 씨앗을 전합니다. 세상의 불의에 대하여 외면하고, 타협하신 것이 아니라, 적극적 저항을 말과 몸으로 하셨습니다. 또 그런 세상과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희생하셨습니다. 그런 주님이시기에 지배자가 아니라 참 지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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