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

발자국

한국 역사에 있어 김 구 선생의 평가는 다양합니다. 그는 한국의 교육자요, 독립운동가이며, 통일 운동가였고, 정치인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년 중국상해에 설립된 망명임시정부였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으며, 광복 이후에 임시정부법통 운동과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한국 역사의 한 인물입니다. 그가 쓴 백범일지에 이런 김 구의 말이 있습니다. ‘눈 길을 걸을 때 어지럽게 걸어가지 말라. 오늘 내가 남김 발자취가 훗날 뒷사람들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두껍게 쌓인 눈길 위에 바른 이정표를 남기고자 한평생 애썼던 백범 김 구의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실제 김 구는 수많은 바른 이정표와 믿음직한 발자국들을 찍었던 큰 사람입니다. 백범은 눈길을 걸을 때 발을 내딛기 편하고 깨끗한 부분만을 걷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며 잔가지들에 많이 긇히기도 했었을 것이고, 많은 장애물들을 맞닥뜨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른 길을 가려는 의지와 치열한 삶이 있었기에 올바른 목적지를 향한 선명하고 커다란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자국을 따라갔던 베드로, 주님과 함께 사역할 때는 주님을 실망시키기도 하고, 배반하여 도망가기도 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자신을 용서해 주신 은혜를 받은 후 목숨을 내놓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합니다. 베드로는 우리들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본을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걸어갈 바른 길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이라는 눈길 가운데 주님의 발자국을 찍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눈길의 주님 발자국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우리가 찍는 발자국을 보고 따라오는 우리 자녀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안갯속 영종대교

안갯속 영종대교

오래전 서울에서 중고등부 담당 전도사를 할 때 인천 앞바다 용유도에 여름수련회를 간 적이 있습니다. 신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인천 연안부두에 용유도를 들어가는 여객선을 타러 갔는데, 그날 인천 앞바다에 안개가 너무 많아서 배가 출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한참 기다리다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영종도를 갔고, 그곳에서 용유도를 잇는 도로 공사를 하는 길을 따라 불평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몇 시간을 걸어 용유도에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안개가 많은 지역입니다. 엊그제 영종도에서 서울로 나오는 영종대교에서 106중 추돌사고가 났습니다. 심한 안개로 인해 안전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속도를 내고 가다가 관광버스가 서행하던 승용차를 들이받는 것을 시작해서 연쇄적으로 추돌사고를 낸 것이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구분될 수 없는 심각한 대형사고였습니다. 바다 위의 다리에서 일어난 사고였지만 다행히 바다에 추락하는 사고는 없었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 2명이 사망하고, 70여명이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공항에서 나오는 길이기 때문에 다수의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개로 인한 사고이지만, 서행 및 정지등 강한 경고나 통행금지등을 했었다면 큰 사고를 미리 막을 수 있음에도 그렇지 못해 생명을 잃은 것은 큰 아쉬움입니다. 한국을 방문할 때 나도 그 길을 몇 번 다닌 적이 있기에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운전자가 전후방을 볼 수 없는 안갯속 영종대교에서의 빠른 운전은 사고가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안갯속과 같이 불투명하고 불안한 것은 영종대교나 고속도로뿐이 아닙니다. 우리의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치지향적인 삶이 깨지고 물질중심과 이기주의 그리고 편의주의가 팽배해지면, 세상은 안갯속과 같이 흐려집니다. 여기에 삶의 스피드가 가해지면, 세상은 그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명약관화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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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갑질

슈퍼 갑질

한국사회를 읽을 수 있는 한 방법은 코메디 프로그램입니다. 사람들을 재미있게 웃을 수 있도록 만드는 예능프로그램이지만, 각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현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 facebook에 나온 코메디 프로그램은 재미있는 형식이었습니다. 옷가계에서 중국집에 음식을 주문했는데, 배달이 약간 늦었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이 배달을 온 친구에게 아래 사람을 대하듯이 무례한 행동을 했습니다. 말로 모욕을 주고, 심한 욕설을 하며 얼굴까지 때렸습니다. 그러다가 가져온 음식으로 인해 중국집 배달하는 친구가 입은 옷이 더러워졌습니다. 지저분한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사려고, 지금까지 자신을 못살게 굴었던 옷가계 주인에게 새 옷을 사려고 하니 옷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때부터 입장이 바뀌어서 중국집 배달하는 친구가 그 옷가계 주인을 똑같은 방식으로 모욕을 하고 욕설을 하며, 얼굴까지 때렸습니다. 그들의 엉뚱한 발상에 웃었지만, 그냥 웃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계를 갑을관계라고 합니다. 갑은 대체로 권한을 갖고 있고, 돈을 주는 쪽입니다. 비즈니스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용어였지만, 이제는 사회속에서 일반화된 용어가 되었습니다. 갑의 행동에 대하여 부정적인 접미사인 ‘질’을 붙여 갑질이라고 하고, 심한 경우 슈퍼 갑질이라고 합니다. 갑을관계는 선택의 관계이지만, 항상 을은 약자가 되어 힘듦을 당하는 한쪽입니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계약이 파기되든지, 관계가 깨지면 심각한 손해 혹은 문제가 되기 때문에 비인격적인 대우에도 불구하고 참을 수 밖에 없는 관계입니다.

사랑과 평화의 주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갑질을 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정신과 정반대되는 생각과 삶이기 때문입니다. 갑질의 근본바탕은 탐욕이고, 비인간화이며, 위선이며 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갑의 위치를 포기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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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Hope)이라는 것

희망(Hope)이라는 것

얼마전 겨울방학이라 집에 온 귀래와 함께 오랜만에 몬트레이의 수족관(Monterey Bay Aquarium)에 다녀왔습니다. 귀래와 함께 온 친구가 몬트레이 수족관의 수달(Sea otter)을 보고 싶다고 해서 간 것이었는데 재미있는 작은 가족여행이었습니다. 귀래가 어렸을 때 한번 함께 간적이 있었지만, 이번만큼 여유를 가지고 자세히 본 것은 처음입니다. 정말 다양한 물고기류, 해초류, 조류등 깊은 바다속에 있는 각색의 해양 생물들이 장관이었습니다. 빛을 받은 붉은색 해파리(jellyfish)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부모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수족관이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할 수 있는 어른들이 여유있게 갈 수 있는 좋은 곳입니다.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수족관 한 벽에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라는 말이 쓰여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시인 에밀리 디킨스(Emily Dickinson)의 시의 제목입니다. 처음에 이 글을 읽고, 그곳에 바닷가의 새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라는 것은 작은 깃털들로 모아진 것‘이라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더 넓은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그 시의 원문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우리 영혼에 살짝 앉아있는 한 마리 새와 같은 것인데, 끊임없이 그치지 않고 노래를 한다는 것입니다. 모진 바람 속에서도, 아무리 심한 폭풍 속에서도 노래를 그치지 않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를 위로하고 힘을 주며 새롭게 일어날 수 있는 노래를 해 주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시인은 노래를 합니다. 모든 것을 바랄 수 있는 있는 상황에서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희망이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며, 그 바랄 수 없는 것을 이겨나가게 해 주는 신비한 힘이기도 합니다.

디킨슨은 희망에 대하여 노래했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희망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 주님을 통한 희망을 노래하고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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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과 탈육신

성육신과 탈육신

한국사회와 한인사회의 모습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동일합니다. 인터넷의 영향으로 거리의 간격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문화는 바로 여기의 문화이며, 여기의 문화를 보면 서울을 보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스마트폰입니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스마트폰은 빠질 수 없는 한 구성요소입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했었나를 혼동하게 합니다. 스마트폰은 문명의 이로운 기기입니다. 편한 세상으로 이끌어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실제 많은 도움이 되고 있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기여를 했습니다. 이런 우리 시대에서 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디스인게임징 (dis-engaging)이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말하면 서로 엮이지 않으려는 문화라는 것입니다. 정말 잘 표현한 말입니다. 스마트폰이 서로를 연결하기 위한 도구인데, 자세히 보면 지금 여기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연결되지 못하는 장애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없을 때는 식사를 하든, 커피를 마시든, 아니면 모임을 하든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했고, 그렇지 못하는 것을 배려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4명이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으러 가서 각자 스마튼폰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곁눈으로 보면 정말 심각한 내용들이 아닌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인간의 외로움입니다. 함께 있어도 함께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외로움의 모습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문자가 아닌 마음을 서로 전해야 하는데, 마음과 영혼이 없는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나시기 위해 성육신하셨습니다. 인간의 얼굴과 얼굴을 대하기 위해 성육신(in-carnation) 하셨는데, 우리 시대는 성육신이 아니라, 탈육신(ex-carnation)을 하고 있습니다. 삶의 탈육신을 극복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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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와 모독

표현의 자유와 모독

새해가 시작되면서 세계를 시끄럽게 하고 복잡하게 했던 사건이 프랑스에서 있었습니다.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라고 하는 언론사에서 비참한 저격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언론사는 풍자신문으로 유명한 신문사로, 이슬람에 대하여, 특히 이슬람 무함마드를 끊임없이 비하하고 모독하는 글과 만화를 올려 유명한데, 이에 격분한 이슬람 원리주의 성향을 두 테러리스트가 총기를 난사하여 12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들의 총격으로 희생된 경찰 가운데는 이슬람교도들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고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성향으로 이런 참사가 일어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평화를 지향하는 우리 기독교에서도 원리주의, 극단주의 기독교와 단체가 있어 때로는 오해를 받는 것처럼, 종교로서의 이슬람은 우리와 비슷한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임에도, 원리주의 극보수주의 이슬람교도들도 있고, 그들이 행한 테러였습니다. 2007년 버지니아텍에서 조승희의 총격으로 32명이 생명을 잃었을 때, 우리 한인들이 느꼈던 불안감을 이슬람교 사람들이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바른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테러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특히 표현의 자유가 지켜져야 하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상적인 문제로 테러를 가한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선택이고 판단입니다.

그럼에도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모욕하는, 특히 종교적인 대상을 지나치게 모욕하는 것은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내 신앙과 신앙의 대상이 중요한 것처럼, 그들에게도 중요한 것이기에 배려를 해야 합니다. 나의 주님인 예수님을 끊임없이 비하하고 모욕하는 그림을 우리에게 주는 친구가 있다고 했을 때, 우리가 갖는 마음과 분노를 생각하면 됩니다. 종교적 갈등은 세상의 평화를 깨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 됩니다.

평화의 집

평화의 집

한 믿음의 자매가 함경도에서 어렵게 탈북을 하여 중국에서의 힘든 시간을 거치고, 중국을 횡단하여 새로운 땅으로 갈 수 있는 디딤돌인 태국에 도착했습니다. 그곳 수용소에서 거의 1년이라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난민(refugee)지위를 가지고 꿈에 그리던 미국에 입국했습니다. 2년동안 우리 동네 여러 곳에서 힘든 일을 하며 삶의 훈련을 하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뜻이 있어 그 자매는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있었던 시카고 믿음의 사람들의 초청을 받고 몇 개월전 그곳으로 갔습니다. 오래전부터 북한민족들을 위해 기도해왔던 사람들이 시카고의 한 집을 마련하여, 북한의 고향을 떠나 여기에 있는 젊은이들을 초청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1년 동안 미국생활을 하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전적인 영어공부를 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주변교회에서 이들이 그곳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시카고의 좋은 대학에서 공부하는 한인 젊은 크리스챤들이 자원하여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위한 문화와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1년이 지나면 나와서 학교에 진학하든지 삶을 위한 직업을 찾는다고 합니다. 시카고의 젊은 사람들이 시작한 그 평화의 집은 북한민족을 섬기고 선교하기 위한 아름답고 복된 땅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산호세지역에 거의 15-20여명의 북한가족들이 있습니다. 초기에 정부에서 지원해 주지만 6개월 정도 지나면 자립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들을 위해 우리 산호세지역의 교회들이 사랑의 나눔을 통해 집 하나를 마련해 준다면, 그래서 고향을 떠난 아픈 마음을 서로 나눌 수 있다면,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일들을 펼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는 주님말씀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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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옷

새로운 옷

목회자이기 때문에 정장을 많이 입어야 하는 저는 양복을 비롯해서 정장 비슷한 상의와 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입어온 양복이 있는가 하면 최근에 입기 시작한 옷들도 있습니다. 저에게 양복과 함께 입어야 하는 와이셔츠도 적지 않게 가지고 있고, 물론 넥타이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계절에 따라서 혹은 예식에 따라 다른 양복을 선택하고, 넥타이도 가능한 상황에 맞춘 색깔과 스타일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성찬식을 비롯한 특별한 예식에는 목회자용 와이셔츠를 입고, 때때로 목회자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이 모든 종류의 옷들은 목회자로서 모든 사람들 앞에 바르게 서기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옷이라고 하여도 깨끗하지 않으면 입을 수 없고, 교인들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세탁하고 준비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항상 교인들 앞에 새 옷과 같은 깨끗한 옷을 입어 말씀을 전하고, 삶을 나누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 옷과 같은 깨끗한 옷을 입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만, 내 자신이 몸가짐을 새롭게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세탁한 양복이나 와이셔츠를 처음으로 입을 때의 느낌과 행동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젊은 여성들은 더욱 여성스럽게 행동한다고 심리학자가 말했습니다. 예전에 군복을 입은 예비군들의 행동을 보더라도 얼마나 옷이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 안에서 새로운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빛의 갑옷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옷은 내 자신을 보호하고, 세상을 이겨나가기 위한 새 옷입니다. 이번 한 해 동안 동정심, 친절, 겸손, 온유 그리고 오래참음의 옷을 끊임없이 새롭게 입는 믿음의 해를 만드십시오.

지록위마

지록위마

매년 연말이 되면 한국의 대학교수들이 올 한해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규정짓는 사자성어를 발표를 합니다. 교수들은 한국의 지성인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발표하는 사자성어는 한국사회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해에는 ‘지록위마’(指鹿爲馬)를 꼽았다고 발표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이 사자성어는 중국 사기(史記)에 나온 사자성어로, 환관 조고라는 사람이 어린 호해를 황제로 내세우고, 자신을 반대하는 원로 중신들을 가려내기 위하여 어린 황제 앞에서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호해가 믿지 못하고, 중신들에게 물었지만, 대부분 말이라고 답했고, 사슴이라고 답한 중신에게는 죄를 씌워 죽여버렸다는 역사가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옳고 그름을 섞고 바꾼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윗사람을 농락해 권세를 부리거나, 진실을 조작해 남을 속인다는 의미로 쓰여지는 사자성어입니다. 우리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슴을 사슴이라 말을 하지 못하는 사회의 부도덕성과 사슴을 사슴이라 말하지 못하고, 말이라고 거짓하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회의 부패성이 한국사회에 만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권력과 탐욕은 세상을 병들게 하는 중요한 원인들입니다. 지록위마의 현실은 사람들이 배우지 못해 무식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탐욕과 물신주의에 빠진 세상이 만들어낸 병든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록위마의 현실은 정치에서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더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나가야 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거대한 도전입니다. 5%의 소금이 바다를 썩지 않도록 한다는데, 한국 기독교인들은 25%나 되는데, 지록위마의 말이 나오는 것은 우리의 부끄러움입니다. 깨어있는 자들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건망증

교회의 건망증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이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대통령은 누구인가의 질문에 1위를 기록한 대통령은 40대 대통령 레이건 (Ronald W. Reagan)입니다. 이 존경을 받던 레이건은 2004년도 서거를 했는데, 서거하기 10년 전에 자신이 뇌세포가 손상되는 알츠하이머병(치매)이 있다는 것을 발표를 하고, 국민들을 위해 일할 수 있었던 것이 영광이며, 감사하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치매는 미국의 대통령도 걸릴 수 있는 병의 일종입니다. 치매와 비슷한 건망증이 있습니다. 건망증은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들을 기억해야 하는데 기억 용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치매는 어떤 기억을 영원히 상실하는 뇌질환이지만, 건망증은 일시적으로 잊어버리는 자연스러운 노화현상입니다. 치매는 증상이 천천히 악화되는 반면, 건망증은 기억을 잊는 증상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회복됩니다. 우리집 주소를 잊어버리는 것이 건망증이고, 우리 집이 어딘지 잊어버리는 것이 치매입니다.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갔다가 파머를 하느냐고 딸의 결혼식을 잊고 여유있게 잡지를 보고 있다가 결혼식에 참석을 못했다는 건망증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치매에 걸린 친구 분들을 보아왔던 어른이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치매약이 빨리 나와야 한다. 그 약을 먹으면 치료가 되든지, 아니면 죽든지 해야 한다. 그때는 잘 이해를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가 갑니다.

얼마전 바른생각을 하는 한 분과의 대화에서 교회의 건망증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웃어넘겼다가 제 마음에 남아 곱씹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과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한국교회가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본질과 방향을 잊고는 아무런 문제 의식없이 가고 있는 현실을 아파했습니다. 믿음의 반석 위에 복음의 생명력을 이루고 전하는 교회의 본질을 잊어버리는 건망증은 치매로 이어져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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