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김의걸 집사)
2014/02/18 댓글 남기기
성경을 읽다 보면 구원에 이르는 문은 여러 개가 아닌가 싶다.
산상수훈을 보면, 마음이 가난하더든지 그냥 가난하기만 해도 천국은 저희 것이라고 한다.
거지 나사로를 보면 그냥 천국에 갔다.
낯선 나그네를 환대해도 천국간다. 고대사회에서는 어떠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현대와 같은 불신사회에서는 낯선 나그네를 환대하기가 싶지 않을 것이다.
목장모임과 관련해서 네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을 만났고 중풍병을 고친 이야기를 접했다.
유년주일학교때부터 듣던 매우 익숙한 이야기이지만,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했다.
친구들 잘 두는 것이 또 다른 구원에 이르는 문인가?
지붕을 뜯고 예수앞에 등장한 중풍환자와 그를 도운 사람들의 무례함이 먼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수많은 무리들 대부분이 자신의 병의 치유를 기대하거나 각자가 원하는 이해관계속에서 예수를 만나기를 원하여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운집해 있는 곳에서 이들의 행위는 새치기수준을 엄청 넘어선 거의 폭력에 가깝다.
그들의 행위가 야기하는 소음, 먼지 등이 예수님을 비롯한 거기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환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예수앞에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 드디어 자기 차례가 된 심한 천식에 걸린 어린 아이가 부모의 품에서 고통스러워하면서 있었을 수도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니 화가 난다.
이런 몰상식한 이야기를 복음서 기자들이 왜 중요하게 다루었을까?
진짜로 친구들 잘 두는 것이 또 다른 구원에 이르는 문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인가?
복음서에는 유난히 장애자, 환자의 이야기가 많다. 다른 종교의 경전에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유는 유대인들이 질병에 대하여 가지는 독특한 의식, 즉 죄로 인해 병에 걸렸다는 의식때문인 것 같다. 예수의 제자들조차도 선천성 시각장애인을 보고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냐?”라고 묻기까지 하였으니….
이야기의 주인공의 하나인 중풍병자의 처지와 상황을 이해해 보려해도 그의 이름은 당연히 알지 못하고 특이하게도 그 사람의 대사 한마디도 없다.
예수님앞에 오기전의 그를 합리적으로 추정을 해보면,
아마 이 중풍병자는 몸이 병들었다는 사실 자체뿐만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 때문에 훨씬 심한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는 이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비난하고 그 비난은 그의 마음까지 병들게 하였을 것을 쉽게 추정할 수있다.
사실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병들고 무식하고 가난한 것이 무슨 죄로인한 것인양 취급하는 경우가 있다.
한편, 원인이야 어쨌든지 참 불쌍하다고 여기고 도와주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사람을 도와주던 네사람처럼… . 아마 그는 이런 주변의 동정심으로 버텨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예수님이 이들의 믿음 보고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 네 사람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것 같다. 중보기도의 중요성 이런 것들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곰곰히 상식선에서 이들의 동정심(이런 예수님이 믿음이라고 말하였지만)을 곱씹어보면, 요즘도 장애인에 대하여 동정심을 경계하고, 있는 그대로의 친구가 되는 것이 중요하듯이, 중풍병자를 동정심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되면 이들사이에는 늘 틈이 놓이게 된다. 심한 경우에는 중풍병자를 도와주는 것이 자신의 도덕심을 증명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한편 예수님 앞에서의 이 환자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은 자발적이었든지 친구들의 권유때문이든 우여곡절끝에 병이 낫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예수 앞에 등장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병은 죄로 인한 것이라 확신하는 서기관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신의 죄를 결정적으로 증명해낼 수 있는 서기관들 앞에서 이 중풍병자는 아마 절망에 늪에 있는 자신의 처지를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죄가 용서받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실제로 당하는 육체적 질병보다 훨신 감당하기 힘들었던 마음의 병을 제거해주는 소리였을 것이다. 이 사람이 예수의 말을 그대로 믿었는지 아니면 얼떨떨해 했는지 성서가 묘사하고 있지 않고 있긴 하지만 그 후 병이 실제로 치유된 것을 보면 마음의 병이 씻겨졌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예수의 말씀에 집중해 본다.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아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 서 어느쪽이 말하기 더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내가 네게 말할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라”
한마디 한마디가 의미심장하고 가슴이 떨린다.
장애인을 죄인으로 단정하고 자기 공동체로부터 구별해버리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의 전통에 근거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장애인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알고 있었고 이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중풍병이 치유되기 전에 즉,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라”고 말하기 전에 이미 온전한 인간,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으로 회복된 것이다. 인간이 견디기 힘든 것은 장애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차별이 아니겠는가?
역시 이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었고, 그 상대방 악역은 서기관과 인간성을 말살하는 율법에 휩싸인 유대종교지도자들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그 선포가 소수자에게는 차별과 왕따 세상인 유대땅의 장애인들과 소수자들에게 진정 희망의 메세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이 사죄선포가 빌미가 되어 ‘신성모독’의 죄로 십자가처형의 빌미가 되었으니…
이 사죄선포는 예수님의 전 생애, 전 기독교의 역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였던 것이다.
(교인의 글/김의걸 집사)